극작가. 데뷔 이후 희곡과 소설, 역사물과 현대물의 장르를 넘나들면서 다양한 작품을 집필해 온 작가는 우리나라 드라마의 큰 축을 담당해 온 대표 드라마 작가다. KBS 사극 『맥』『태양인 이제마』『객주』『먼동』 등을 대표작으로 꼽는 그는 충실한 자료 수집과 조사를 바탕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뒷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내는 것에서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역사소설이 사실에 근거해야 하며 애초에 없었던 사건을 마치 있는 것처럼 포장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즉 역사소설이 기본적으로 실재한 사건에 근거할 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토정 이지함의 일대기를 다룬 이 책에서 단순히 점술가가 아니라 백성을 사랑한 인물로서 토정 이지함의 삶을 좀 더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비전은 진정 있는 거요?” “예에?” 대답하는 최규서보다 배창진이 더 놀란다. “있는지는 명확치 않으나, 그 예언대로 이 땅에 피바람이 몰아칠 운명은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소.” 진짜 오늘의 상황을 예언한 비전이 있는 걸까? 배창진은 처음 자신을 보령 한산 이씨 종가로 내려가라던 우암 송시열이 한 말이 떠올랐다. “토정 선생의 종가니라. 넌 토정이 누구인지 잘 모를 테지만, 흔적은 있을 게다. 그 흔적이 금상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유일한 끈이 될 수도 있을 터.” 우암은 그 말을 한 이후, 짧은 기침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배창진이 하직 인사를 올릴 때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그 눈은 무겁게 감겨 있었다. --- p.55
“어디로 가는 걸음인가?” “그게 왜 그리 궁금하시오?” 한참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던 우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지함의 퉁명스러운 대답이다. “기왕이면 심심찮게 말동무나 할까 했지. 싫은가?” “싫고 좋고 간에 따라붙을 거잖소?” “남의 속을 어떻게 그렇게 꼭 짚어 아는 척하는 거야? 아닐 수도 있지.” “흥! 엊그제 호패 얻어 찬 아이에게 어른이 이리 치근거리는 걸 보면, 싫다고 해도 동행할 작정을 이미 한 거 아니오?” “우리 화해하는 게 어떤가? 난 전우치라고 하네.” 상대가 느닷없이 통성명을 청하자 지함은 머쓱해진 기분이다. --- p.87
“니 맘속에 장도(粧刀)를 가지고 있느냐?” 화담은 지함의 물음에 가타부타 대답은 않고 또다시 불쑥 엉뚱한 소릴 꺼냈다. 장도? 주머니나 소매 속에 넣고 다니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이르는 말 같긴 하지만, 지함이 딱히 그렇다고 단정 짓지 못하는 건 화담이 불쑥 꺼낸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함은 잠시 머뭇거렸다. 더 기다리지 않고 화담이 말을 이었다. “물욕이 생기면 그 물욕을 자를 수 있는 장도. 권력욕이 생기면 그 권력욕을 자를 수 있는 장도. 음욕이 생기면 그 육욕을 자를 수 있는 장도.” --- p.150~151
“허, 왜 이러고 있누?” 전우치의 목소리다. 전우치가 또 나타났다. 지함은 미처 상황 판단을 못 하고 우치를 멀거니 쳐다본다. “아무리 글 읽기 좋아하는 서생이라지만 지금이 어떤 땐데 이러고 있어? 사람 참, 그렇게 눈치가 없어?” “무슨 소리우?” “아, 황진이가 왜 한사코 자넬 붙잡았겠나? 자네도 이젠 인간 세상의 쾌락을 경험해 볼 나이가 됐잖은가. 안 그래?” “무슨 가당찮은 소리요? 내가 뭘 어쩐다구요?” 지함은 화가 난 목소리다. “흐흐, 무릉도원이지, 암. 망설이지 말고 별당으로 가 보아. 진이가 비단금침 펼쳐 놓고 자넬 기다린다니까.” 지함은 윗목에 놓아둔 오그랑망태를 집어 우치를 향해 힘껏 패대기친다. “아쿠!” 우치가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쿵덕 엉덩방아를 찧는다. “돌팔이 도사 주제에 사람을 뭘로 보고 희롱질이야. 이제 보니 용소에서 생긴 일도 그쪽 소행이군! 당장 썩 꺼지지 못해.” --- p.141~142
“숙부님!” 산해의 소리에 지함이 천천히 얼굴을 돌린다. “조정 중신이 입궐은 않고 여긴 어쩐 일이더냐?” 산해는 순간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너무나 여유로운 숙부의 표정 때문이다. “무겁지 않으십니까?” 큰절을 올리고 산해가 한 말이다. “갓보다야 무겁지. 하나 견딜 만해.” “그럼 새로 하나 장만하시지요. 솥은 밥 짓는 데 쓰는 도구 아닙니까?” “무슨 소리야? 젖혀 놓고 밥을 지으면 솥이 되고, 밥을 다 지은 후에 깨끗이 씻어서 뒤집어 놓으면 갓이 되는 것이지. 하나를 가지고 두루치기로 쓸 수 있으니 얼마나 실용적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