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우산 없이 걸어보는 파리의 거리, 늦은 저녁 바람 냄새,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 날아온 그림엽서, 엽서 속 낯선 우표와 그 위에 찍힌 푸른 잉크 자국, 상기된 얼굴로 기차역을 오가는 사람들, 보랏빛 주홍빛이 미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노을 진 저녁 하늘, 오랜만에 입어본 낡은 청바지 주머니 속에서 나온 5유로짜리 지폐 한 장, 비 내린 공원 한 귀퉁이 작은 달팽이, 브로셩 거리 낡은 카페테라스의 나른한 의자, 치익 하고 맥주 캔을 따는 순간, 공항 청사의 차가운 바닥을 미끄러지듯 굴러가는 트렁크 소리, 이른 아침의 커피 향, 새로 산 책에서 풍기는 희미한 잉크 냄새, 늦은 새벽 홀로 환히 불 밝힌 누군가의 창문, 예기치 못했던 첫눈, 비행기 티켓 속 운명처럼 조합된 낯선 숫자들, 활짝 핀 해바라기, 욕조 속 고무 오리들, 끝도 없이 펼쳐진 구름과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되는 앙리 살바도르henri salvador의 노래, 안개 낀 휘지에르 다리, 하얀 크로키북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문득 마주치게 되는 서랍 속 그리운 누군가의 오래된 편지, 프랑시스 퐁지francis ponge의 시집, 팔레트 속 울트라 마린, 그리고 지금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 그 수많았던 설렘의 순간들……. --- 「프롤로그」 중에서
프랑스의 아침에는 특별한 냄새가 있다. 버터를 겹겹이 가득 바른 크루아상과 각종 타르트, 밤새 잘 부푼 기다란 바게트가 구워지는 고소한 냄새. 그 냄새는 아직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부터 환하게 불을 밝힌 거리거리 빵집의 작은 굴뚝 사이로 흘러나와 축축한 아침 공기와 묘한 조화를 이룬다.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아침이 시작되는 곳, 거리의 빵집. 대다수의 프랑스 사람들이 짤랑이는 동전을 손에 쥐고 빵집으로 향하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딸랑딸랑’ 경쾌하게 울리는 빵집의 문소리를 들으며, 눈앞에 가득 펼쳐진 빵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설레는 행복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경쾌한 아침 인사가 오가는 그곳에는 서로 다른 아침이 있다. 아직 잠에서 덜 깨 졸린 눈을 비비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 바쁜 출근길에 초조한 듯 시계를 들여다보며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성급히 크루아상 한쪽 끝을 베어 무는 신사, 가족들의 아침 준비를 위한 빵을 양손 가득 안고도 다른 사람들과의 여유롭게 수다를 즐기는 다소 느긋해 보이는 여인, 책가방을 둘러메고 진열장 속 달콤한 초콜릿 빵에 시선을 고정시킨 커다란 눈의 꼬마까지, 고소한 냄새 가득한 그곳에는 서로 다른 아침이 있다. --- 「봉주르 프랑스」, ‘빵 굽는 냄새 가득한 프랑스의 아침’ 중에서
미미야, 내가 늘 말했듯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평범해.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우리 인생 속의 여행객이기 때문이야. 너도, 그리고 나도. 여행객은 언제나 이야기를 만들고 또 흔적을 남기지. 그런데 여행객이란 어쩌면 조금 슬픈 걸지도 모르겠어. 왜냐하면 그들은 어느 한곳에 마음을 묻고 오래오래 머물고 안주할 수 없으니까. 그럼 여행은 끝이 날 테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겠지.
(중략)
그런데 말이지, 가끔은 그 여행객도 어떤 바람에 의해서 혹은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서 한곳에 오랜 시간 머물며 다른 누군가와 많은 것을 나누고 흔적을 남기기도 해. 그리고 또 가끔은 어떤 우연에 의해서 또는 서로의 바람과 의지에 의해서 그 어느 한곳에서 다시 만나 더 많은 것을 나누기도 해. 그러니 비록 다시 긴긴 여행을 떠나더라도 그 소중한 기억을 절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해. 항상 너의 그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길. 하지만 더 강해져야 해.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앞서 나가지만, 늘 올바른 선택을 하길 바라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나누고, 탐험하고, 그 속을 여행하고, 그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길 바란다.
--- 「지금 꿈꾸고 있다면」, ‘파리, 그리고 나는 여행하는 작은 먼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