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렇게 속전속결, 면접 당일 날 오후에 합격자를 발표한다고? 믿을 수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들 똑같은 심정이었는지, 우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6명의 이름들. 내 이름은 없었다.
당연한 결과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애써 스스로를 위안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코트를 가지러 터덜터덜 걸어갔다. 공항까지는 또 어떻게 가지, 집에 도착하면 몇 시지, 비행기 체크인 아직 안 했는데 어쩌지. 그런 생각들만 가득해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면접관이 나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You, Won! You!”
순간 소름이 돋았다. 당황해서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저요?’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서야 사람들이 오늘 하루 종일 나를 내 이름 ‘경원Kyoung Won’을 줄여서 ‘Won’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뜨겁게 북받쳐 오르는 감정. 그 설렘은 다른 5명의 합격자들과 함께 옆방으로 에스코트되었을 때까지도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입사동의서에 사인을 한 뒤 받은 묵직한 서류 뭉치. 그 날, 그 순간의 책임감과 뿌듯함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새하얀 백지 같았던 내 미국 생활이, 아무런 이름도 없었던 내 하루가 비로소 선명해지기 시작한 기분이었다. 마침내 이 거대한 미국 땅에서 아주 작지만 따뜻하고 안락한 내 자리를 마련한 기분이었다. 영어와 인종과 국적의 문제로 내 자신을 질질 끌어내리고 있던 그 실체 없는 두려움을 비로소 잘라낸 기분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내가 될 거야」 중에서
비행기 날개를 지날 때 즈음이었다. 동체가 심하게 흔들리더니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하강했다. 하강이라기보다는 자유낙하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붕 떠진 기분이었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어떤 예고도 없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무중력 상태를 경험한 기분이었다. 당연하게도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채 복도를 어슬렁거리던 내 몸은 하늘 위로 솟구치고 말았고, 이건 그야말로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그 찰나에 들었다. 그때 내 옆에 앉은 남자 승객이 가까스로 내 팔을 붙잡아서 자기 쪽으로 당겨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천장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또 자유낙하를 시작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곧 몸의 균형을 잃고 쓰러졌고 팔걸이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무릎을 바닥에 찧고 그대로 쓸려 넘어졌는데, 내 기억으로는 적어도 2미터 정도는 그렇게 쓸려 간 것 같다. 그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신이 없어서 고개를 들지도 못했는데, 사람들의 비명 소리만은 확실하게 들렸다. “Is she okay?” 저 여자분 괜찮아요?
기체가 안정 상태로 접어들자마자 다른 크루들이 뛰쳐나와 나를 갤리까지 부축해주었다. 나는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팔걸이에 부딪친 이마는 붉게 부어올랐고 머리는 헝클어졌으며, 유니폼 치마는 반쯤 올라가 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 어떤 통증도 다리에서 올라오는 것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두 무릎을 감싸고 있던 손가락 사이로 새빨간 피가 흥건하게 묻어 나왔다. 놀라서 손을 거두고 무릎 아래를 살펴보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찢어진 살색 스타킹이 빠른 속도로 검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마와 팔 등 군데군데 새어나오는 피도 꽤 많았다. 응급상자와 타월을 찾으며 새하얗게 질린 다른 크루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나는 지혈을 위해 수건으로 피가 나는 곳들을 계속해서 꾹꾹 눌러가며 통증을 삼켰다. 이렇게 피가 많이 나서는 어디가 어떻게 잘못 된 건지 파악조차도 할 수 없었다.
---「기내에서는 안전벨트를 꼭 매주세요」 중에서
어른이 되었어도 아버지에 대해서만큼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내 배로 낳은 것도 아닌 작은 강아지 하나조차도 이렇게 소중해서 뭐든지 다 해주고 싶은데, 어째서 당신의 친자식에게 그런 아픔만을 주었는지. 결국 돌이켜보면 내 안의 반발심과 이기성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마침내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 때의 나는, 이불 속에서 덜덜 떨며 제발 좀 그만하라고, 차라리 내 눈앞에서 사라져달라고 울면서 빌고 또 빌던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결국 내 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 삶, 내 자신뿐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자라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오게 되면서부터는 그 이기주의가 정점에 달했다. 가족의 문제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신없이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여행을 다니며 살았다. 쉴 틈이나 여유 같은 건 없었다. 100%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큰 벌을 받을 것처럼 계속해서 내 자신을 채찍질했다. 자꾸만 커져가는 죄책감과 미안함은 어머니에게 부치던 용돈으로 상쇄시켰다. 그러면서 동시에 ‘타지에서 대학생활 하면서 부모님께 돈을 받기는커녕 내가 벌어서 보내드리고 있어’ 따위의 끔찍한 자기만족과 허세도 대단했다. 정말이지 지우개로 쓱쓱 지워낼 수만 있다면 그때의 기억들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한껏 일그러지고 뒤틀린 자아를 움켜잡으며 겨우겨우 인생을 살아가고, 아니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착각이었다. 나는 쿨하게 가족과 인연을 끊은 것처럼 연기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도 그들에게 얽매이고 그 인연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라며 초코파이를 보내준 어머니의 무심할 정도의 짧은 편지 하나에 무너지고, 혼자서도 꿋꿋하게 잘 지내는 게 참 대견스러우면서도 미안했다는 언니의 취중진담에 서울로 가는 기차에서 울고 또 울었다. 앞에 그들이 있었다면 매달리다시피 했을 정도로 눈물을 쏟아냈다. 바닥에 떨어지는 눈물에 내 얼굴이 비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가족, 선택할 수 없기에 더 애틋한」 중에서
나는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영어라는 언어가 여전히 참 무겁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가 나오면 당황스럽고, 내가 기억해낼 수조차도 없는 과거의 문화들 앞에서는 나체라도 된 것처럼 한없이 무너져 내린다.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에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불공평한 것에 올바르게 대항하려고 해도 단순한 단어들로는 어린 아이조차도 설득시킬 수 없다. 내가 바보가 된 것 같고, 나만 혼자가 된 느낌이다. 모국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의 10분의 1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때면 내 자신이 한심할 정도로 비참하게 느껴지고 급기야는 혐오감마저 생긴다.
상대방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다시 천천히, 크고 또렷하게 말하면 되는 일이다. 외국어가 어려운 건 하늘이 파랗고 노을이 붉은 것처럼 자명하고 당연한 일이며, 상대방이 한국어를 모르는 것처럼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 어디에도 당황할 이유가, 부끄러워할 필요가, 나 자신을 낮추고 미안해할 근거가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영어를 잘 못한다고 이야기 할 때, 미안하다는 사과 같은 걸 집어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어로 ‘미안한데 나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라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넘치고 넘칠 만큼 빼어나고 대단하기 때문이다.
---「가장 듣기 싫은 말 ‘Do you remember'」 중에서
일전에 어떤 여성 승객이 기내 화장실 앞에서 쓰러진 적이 있었다. 함께 여행하는 남편의 말로는 장례식을 준비하느라 3일째 잠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했다. 이제 겨우 스물이 갓 넘은 아들의 장례식이었다. 갑작스러운 사고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오랫동안 앓았던 지병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얄팍한 호기심을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의 퀭한 눈에서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을, 그리고 부인마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의사의 진단 후 산소를 공급받고 나서 기력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나는 그 두 사람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내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상실과 부재의 아픔을 그들은 애써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것이다. 그때 퍼스트 클래스 석에 앉아 있던 젊은 커플 두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다가왔다. 필요한 것이 있는가 싶어 물어보려는데, 세련된 양복을 입은 남자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 분께서 많이 아프신 것 같은데, 저희가 자리를 양보할 테니 남편 분과 함께 앉으시라고 좀 전해주시겠어요?”
다시 말해 자기들이 그 부부가 있는 자리에 착석할 테니, 그 부부를 퍼스트 클래스 석에 보내달라는 부탁이었다. 180도 눕혀지는 플랫 시트 좌석에 이불과 배게도 준비되어 있으니, 누워서 편히 비행을 하라는 커플의 배려였던 것이다. 하지만 비행기는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여정이었고, 이제 막 이륙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비행시간의 5분의 1도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금 상당한 금액으로 구입했을 것이 분명한 두 개의 프리미엄 좌석을 그들에게 양보하겠다는 것이다.
---「세상을 빛나게 하는 작은 친절」 중에서
지금까지의 나는 내 삶에만 신경을 써도 부족한 시간을 다른 이들의 삶을 관찰하고, 비교하고, 우위를 점하거나 열등감을 느끼며 지켜봤다. 내 시선이 닿는 삶이 아니라 그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삶만을 고민했다. 내 안의 흔들림을 챙기기도 버거운 시기에 다른 이들의 흔들림을 바라보며 비교하고 위안과 안심을 받기도 했다. 그들의 불행과 고민과 아픔을 위로 해주겠다는 허울 좋은 탈을 쓴 채로, 스스로의 열등감을 남몰래 식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내게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흔들림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적나라하고 속물적인 비교를 통해 얻었던 우월감이나 열등감 같은 것들을 느낄 이유도 없어졌다. 눈앞에 놓여 있는 것들을 누가 뺏어가기라도 할까 봐 급급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현재의 나는 자랑할 만한 것도, 내세울 것도, 경쟁할 만한 것도 전혀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고인 물처럼 정체되어 있는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도 나는 조금이나마 더 친절하고, 따뜻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변화라도 좋으니, 어제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물론 대체 어떻게, 혹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까마득하고, 과연 원하는 것들을 이뤄낼 수 있을지 걱정도 앞선다. 하지만 어쨌거나 일단 해보지 않고서는 영원히 정답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내가 먼저 한 발을 내디딜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누구도 자진해서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기 때문에, 두렵고 무서워도 스스로 헤쳐나갈 수밖에.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내 박자에 맞춰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 「에필로그 - 이 세상 모든 곳의 나를 사랑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