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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으로 노는 남자 1
중고도서

걸작으로 노는 남자 1

이윤미 | 가하 | 2013년 02월 04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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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2월 04일
쪽수, 무게, 크기 488쪽 | 500g | 128*188*30mm
ISBN13 9788966474721
ISBN10 8966474721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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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꺼내 먹어서 미안한데요. 나는 내 나름대로 술을 마시는 이유가 다 있거든요.”

“그래서 삼천만 원어치 술을 앉은 자리에서 동 냈다? 그 이유란 게 굉장한가 보지?”

기대도 않았는데 그가 물어온다. 비아냥거리는 듯한 어투였긴 해도 말이다. 해주는 그새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리곤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처음 마셨던 술의 기억을 쫓아갔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를 그곳에서 처음 만났었다. 제 형의 장례라면서도, 저 살 만큼 살고 죽은 거니 그다지 슬플 게 없다고 말했던 이상한 사람. 그래도 그날 하루는, 이 얼토당토않은 남자의 주관에 휘둘려 가슴이 조금 덜 서러웠던 걸로 기억한다. 입가에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술을 마시면요, 모든 게 희미해져요. 감각도 희미해지고, 생각도 희미해지고, 내가 내가 아니게 되고, 그래서 쓸쓸하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고, 무식하게 용감해지고. 그리고 더 이상 맞이해야 할 내일이 없을 것만 같고.”

해주는 마치 발표를 하듯 오른손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고는 말했다. 굳게 감은 두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난 징크스가 있어요. 작업 들어가기 전에 꼭 목을 축이거든요. 그러면 긴장됐던 게 사라져요. 그런데 오늘은, 아니, 어제죠. 어제는 그걸 못 챙겼어요. 힙 플라스크가 어디 갔는지 없어져서. 그래서 일이 잘 안 풀렸나 봐요. 발목이 접질렸을 땐 꼼짝없이 잡히는 줄 알았는데.”

무서웠다. 금세 쫓아온 경찰이 그녀의 팔목에 쇠고랑을 채울 것 같았다. 그제야, 그녀 자신이 어디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진현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당신이 날 찾아줘서 고마웠어요. 눈물, 나게.”

해주는 쳐들었던 손을 파이팅 포즈를 취하듯 주먹을 움켜쥐며 씩씩하게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손이 따뜻한 체온에 감싸이더니 위로 불쑥 끌어 올려졌다. 거칠게 딸려 올라간 몸은 어느새 소파 위로 안착했다. 배려라곤 하나 없는 투박한 행동이었다.

“주접 떨지 말고 가라고. 네 속, 하나도 안 궁금해.”

소파 등 뒤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 무지막지하게 끌어올린 그가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자비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서늘한 시선인데도, 이상하게 그의 동공에 담긴 자신의 모습에 안도가 되었다.

“마 사장님?”

몸이 늘어졌다. 취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힘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점점 맑게 깨어났다.

“당신 일 도와주는 동안에는 어제처럼 늘 내 근처에 있는 거죠.”

그녀의 팔목을 위에서 세게 움켜잡은 진현에게서는 역시나 예상대로 대답이 없었다.

“나 안 잡히게 해줄 거죠.”

“그런 걸 바라나?”

그가 비웃듯, 냉랭하게 말했으나 그것은 그녀에게 더 이상 화나 짜증을 불러일으키진 않았다. 해주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그의 고개가 더 숙여져 그녀를 쫓는다. 그녀가 행하는 대로, 이 남자는 쫓는다. 쓸데없이 기분이 괜찮아져서 히죽 웃었다.

“내가 당신 일 하다 잡히면, 삼대가 재수 없으라고 저주할 거야. 그러니까…….”

해주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진현의 손에서 팔을 비틀었다. 그러자 손목을 틀어쥔 그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지켜줘요.”

속삭이듯 말한 해주는 그의 옷을 더욱 강하게 잡아당기며 다시 말했다.

“나를 지켜줘요. 뭐든 다 훔쳐줄 테니까 어제처럼 지켜보고, 지켜줘요.”

깊이를 알 수 없는 진현의 검은 동공이 그녀의 의중을 살피듯 흔들렸다. 그녀는 숨길 것이 없었다. 진현의 집요한 동공과 덤덤하게 눈을 마주했다.

“윤해주.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소원화개첩에 대해 네가 원하는 보수.”

잠시 말을 끊은 그가 테이블 가장자리를 흘깃 보았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화통과 그녀의 백팩이 그 언저리쯤 굴러다닐 것이다.

“보수?”

해주가 느릿하니 그의 말을 되씹었다. 아니, 보수랑은 달랐다. 해주는 진현의 셔츠를 틀어잡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천을 뚫고, 그녀 자신의 손톱이 제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강한 힘이었다.

“아닌가?”

그가 눈꺼풀을 가늘게 좁혀 떴다. 해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비웃음으로 느껴졌는지 그의 인상이 다소 험악해졌다.

이렇게, 이 남자가 제 감정을 밖으로 드러낸 적이 있었던가.

해주는 체념했다. 어찌할 도리도 없이, 그녀도 어쩌지 못하는 사이, 이 남자에게 애정을 주고 말았다. 피하려고도 해봤지만 이미 한번 흐름을 탄 물길은 돌릴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겠죠.”

진현의 눈이 한층 더 깊어졌다. 앞뒤 잘라먹은 채 툭툭 뱉는 그녀의 말은, 이성이 냉철하게 깨어 있는 그가 해석하기엔 다소 난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미치게 감정적이었다. 술의 마법으로 인해.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요.”

숨이 거칠어졌다. 술 먹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호흡인데, 바닥에 댄 채 힘을 주고 있는 발목의 통증 때문에 절로 식은땀이 솟았다.

“나는 마진현이 좋아요.”

그에게선 아무런 변화도 감지할 수 없었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이 남자는 그녀를 필요에 의한 말로만 대할 뿐이니까. 그녀가 그의 아래로 들어가겠다고 한 순간부터는 구태여 그 유혹이라는 걸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지금 이 시간부터, 난 내 마음이 쫑 날 때까지 당신한테 덤빌 거야. 많이 귀찮을 거예요. 줏대 없이 들이대고, 나불대고, 맴돌 테니까. 하지만 그건 네 사정이에요.”

빠르게 말을 끝낸 해주는 잇새로 참았던 숨을 뱉었다.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가 얼굴을 들려 했지만 해주는 셔츠를 잡았던 손을 잽싸게 들어 그의 목을 잡아당겼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눌렸다. 찰나였고 사고였다. 그런데 눈가가 시큰거렸다. 이보다 더한 키스를 했을 때보다 더 가슴이 설렁였다.

인정을 하고 나니, 악귀 같았던 남자가, 스치는 옷깃 그 한 자락마저도 미치게 고팠다.

“똑같이 해달라고 안 해. 해줄 사람 아닌 것도 알아. 모른 척해도 좋아요. 도둑년 따위라고 괄시해도 좋고. 당신한테 심장이 없을지라도 난 후회 없이, 아낌없이 사랑할래요.”

일견 도도하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에 얼핏 이슬이 맺혔다. 해주는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감각도 개의치 않은 채, 진현만을 보았다.

가슴으로 사는 윤해주가 사는 방식은 이랬다. 내 가슴이 이러자니까, 지금은 이렇게 하자고 생각했다. 머리로 생각하고 잣대를 놓고 선을 그으면, 더 복잡하고 힘들게 엉기는 건 그녀뿐이다.

해주는 그녀의 감정을 진현에게로 밀어 넣었다. 선택은 네가 하세요.

그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이 무뎌졌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잡은 그의 손도 무뎌졌다. 곧바로 손을 놓은 그가 소파 등 뒤에서 앞으로 돌아 나와 그녀의 앞에 섰다. 눈앞에 버티고 선 그가 태산 같다.

그녀의 선택은 끝났다.

그녀의 편이 되어준다면, 세상 그 무엇도 무섭지 않을 악귀.

진심은 하나뿐이라서 그 외엔 아무것도 없는 남자.

그래서 제 마음이 흘러간 남자.

스스로가 이 사랑에 끝을 고할 때까지, 돌아보는 법 없이 직진한다. 그녀 인생에 돌아보는 건, 후회하는 건,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엄마 하나로 족했다.

“이상. 끝.”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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