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행이 길목인 읍내의 상설시장 안을 막 들어서는데, 저만치 앞의 어물전에서 고기를 팔던 젊은 색시 한 사람이 황급히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우리를 보고 피해서 도망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때 공교롭게도 신고 있던 운동화 안에 흙이 들어가서 얼마간 지체하다가 일행에 뒤처져 그 어물전 앞을 지나면서 무심코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을 재어 보고 이제는 지나갔으리라고 짐작했던지, 그 색시가 집 모퉁이에서 얼굴을 내어 밀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새댁 옷을 입고 비녀를 찌른 ‘경순’의 눈과 얼굴이 거기 있었다.
--- p.38

“우리 어머닌 내가 죽였다. 니들 알잖아, 심장이 약했던 거……. 형수님 말이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목구멍 안에서 내 이름을 부르더라고… 난 말이다, 난 어머니를 단 5분 동안만이라도 되살릴 수 있다면, 그래서 ‘어머니 미안합니다’하고 한 마디 말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이 팔다리를 잘라 주어도…….”
ㄴ은 다시 격렬하게 몸부림치면서 흐느꼈다. 그것은 피를 토할 것 같은 소리 없는 절규였다. 어머니를 향한 절규였을까. 신 또는 운명을 향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까.
--- p.155

해마다 6월이 되면 2년 동안 잠을 재운 매실주를 개봉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분이 직접 시장에 나가 고른 햇매실을 물 한 방울도 섞지 않고 주정에 넣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 몇몇 친지 동료들을 불러 시음회를 열었다. 나는 청년 교사였던 시절에 한때 가까이에서 모셨던 인연으로 단골로 초대받는 사람 중 하나였다. 시음회는 교장 댁의 연례행사였다.
“문 선생, 내일 저녁 우리 집에 놀러 오시오. 올 때 그 재미나는 이야깃거리 한두 개 준비하는 거 잊지 말고…….”
--- p.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