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하여 지금도 살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국문과 졸업, 강릉대학교에서 '시집살이 노래의 존재양상과 기능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65년에 교직에 몸담아 2002년까지 중등교사, 중등장학사, 중등교장을 지냈다. 80년대에 고전문학 자습서(지학사), 문법 습서(지학사), 학교 문법의 이해(문원각) 등을 편찬하였다. 96년, '대통령 표창장'과 '홍조근조훈장'을 수상했다. 퇴임 후에는 체력 단련을 위해 골프 연습으로 소일하며 수필을 쓰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2017년, 한빛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하여 그간 간직했던 작품을 모아 첫 수필집 '정동진 여정'을 발표하며, 후속 작품집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웅성거리던 주위가 숙연해진다. 떠오르는 해를 합장한 모습으로 기도하듯 경건하게 바라보는 사람, 그대로 온몸이 정지된 듯 굳어 있는 사람…. 모두가 하나로 일체되어 있는 모습이다. 자연과 인간이 이렇게 동화되어 나타나는 정경에 내 마음까지도 성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바로 서기였다. 옛사람들이 다가오는 천 년을 내다보며 이곳에 향목香木을 묻었듯이 이제 천 년의 시간이 흐르면 밀레니엄 신드롬에 젖어 새로운 천 년을 맞이하겠지. --- p.16
밤새 서리가 얼어 나뭇가지마다 서리꽃 상고대를 피게 했다. 설화보다 더 고결한 느낌을 주며 온 산야를 하나로 만들어 놓았다. 살아있는 크리스마스트리Christmas tree라고 이름 붙일 만한 풍광이다. 우리는 새롭고 신기한 것을 만나면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어디인가 있지 않나 고심하지만, 자연의 모습은 우리 언어의 영역을 뛰어넘을 때가 많다. 상고대로 모든 산줄기가 하얀 꽃동산을 이루었지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가슴 속에서 맴돌기만 하고 밖으로 표출할 수가 없다. 아침 햇살을 받은 상고대가 핀 나무에서 반짝반짝 빛을 쏟아내는 광경은 신비스럽다는 느낌이다. --- p.26
내가 가는 길의 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는 이 글이 나타내고자 하는 속뜻은 참된 삶과 근신이다. 내가 밟고 간 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니, 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히지 말라는 것은 인생살이에서 항상 조심하고 근신할 것을 강조한 말이다. 여기서 발걸음은 삶의 자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현실적인 오늘의 행적이 밑받침이 된다. 우리의 현실적 삶은 늘 지난 일에 대한 뉘우침으로 점철되곤 한다. 깨우치고 나서도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고 다시 어제로 돌아간다. 어제는 지나온 시간일 뿐이지 내일의 희망을 지향하는 시간은 아니다. --- p.53
단풍이 지고 나면 산은 본래의 모습으로 적막에 싸인다. 북적이던 사람의 모습도 단풍에 떠밀려 하산하고 만다. 세상은 생각만큼 넉넉하지도 너그럽지도 않다고 할지 모르나 자연은 늘 풍족한 마음을 우리에게 보낸다.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모든 이들에게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내일이면 또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 p.127
지나온 일들이 새삼 떠오르며 아득히 먼 곳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때가 있다. 자취를 감추었던 일들이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기도 하지만, 아예 꼬리조차 가늠하기 힘들어진 모습이 하나둘이 아닌 시간여행이다. 주위를 정리하다 보면 까맣게 잊었던 일들이 또렷한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어제 일도 잊히기 일쑤인데, 이럴 때면 먼 날의 기억들이 지금 겪고 있는 일처럼 시간여행에 동행한다. 지나온 일들은 추억이라는 너울을 쓰고 오늘에 겪는 일보다 미화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의 생활이 어려울수록 추억은 더 아름답게 피어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