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강사가 되어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인 걸 어떻게 알아요?’입니다. 애인이 있는 사람이나 솔로나 각각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말 같습니다.
저는 이 질문에서 기대와 좌절을 듣습니다.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고 싶다. 연애하고 싶다. 나만 이렇게 연애가 어려운 것인가? 어째서 나는 모태 솔로일까? 내 짝은 도대체 어디에 있냐고! 연애가 이렇게 힘든데 행복한 결혼이란 가능할까? 만나면 편하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과 편하진 않지만 설렘이 있는 사람 중 어느 사람을 선택해야 할까?’ 녹록지 않은 연애와 늦어지는 결혼에 대한 온갖 복잡한 감정이 묻어나는 한마디가 ‘그 사람인지 어떻게 알아요?’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사람이 내 짝인지 아닌지는 나만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인지 아닌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용하다는 연애 강사도, 청년부 목사님도, 롤모델로 삼은 선배도 아닌 당사자인 내게 말입니다. --- p. 17~18
사랑하는 사람과 싸우는 일은 슬프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아예 싸움이 일어날 일은 회피해 버리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두려울까요? 그렇죠. 헤어짐이 두렵습니다. 갈등해서 마음 이 조금만 멀어져도 헤어짐이 연상되니까요. 헤어짐을 두려워하는 연애는 건강한 연애, 진정한 의미의 사랑인 ‘자기 확장’으로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좋은 연애는 절대 헤어지지 않을 것처럼 자신을 내어 주는 열정과 몰입, 언제라도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은 당당함이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어렵죠? 원래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들은 어렵고 복잡하답니다. 서로가 뿜어내는 독가스로 애정 전선의 기류가 안 좋아질 때, 그때가 사랑이 커지고 깊어지는 기회입니다. 어설픈 스킨십이나 이벤트, 선물 공세로 얼렁뚱땅 넘어 가지 말고 대화로 돌파해야 합니다. 설령 대화로 시작해서 울 고불고하는 싸움으로 끝나더라도요! --- p. 26
우리는 연애의 실패, 아니 고백조차 해 보지 못하고 흘려보낸 짝사랑을 모두 ‘내가 못난 탓’으로, ‘내게 사랑스럽거나 매력적인 구석이 없다’로 해석해 버리는 나쁜 목소리를 품고 있습니다. 단언컨대 킹카, 퀸카라 불리는 남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존재로부터 나오는 불안입니다.
“미안해. 너를 사랑했었고, 너는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었어. 내 맘을 한결같이 지키지 못한 걸 용서해 줘”라고 용기 있게 헤어짐을 말할 수 있을까요? 헤어짐의 아픔으로 이대로 영원히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 싶은 밤을 여러 날 보내더라도 ‘미운 건 오히려 나’라며 자존감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대신 자기 성찰의 맑은 눈을 가지기로 선택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나요? --- p. 30~31
더 내려놓을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말아요. 무엇보다 하나님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 마음으로 내려놓을 항목을 찾는 것이라면, 혹시 그런 것 같으면 정말 차라리 다 싸들고 있자고요. 정 내려놓고 싶거든 뼈를 깎는 고통이 따르는 내려놓음을 선택해서 조용히 실행해 보시고요. 얄팍한 희망으로 외로움과 불안을 덮으려 하지 말고 외로운 오늘, 불안한 오늘을 있는 그대로 살아요. 피하지 않고 오롯이 견디는 그것이 오히려 희망입니다. --- p. 57
좋아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고백 한번 못 하고 분위기로 알아 달라는 소심함은 무엇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기보다 선택당해서 사귀고 결혼하려는 무책임한 태도는 무엇이고요? 내 몸에 대한 권리를 애인에게 양도하는 것, 코앞에 닥친 결혼을 추진하지 못하는 것은요? 이렇듯 낮은 자존감은 사랑 앞에서 가장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렇구나, 낮은 자존감이었어. 자존감이 바닥인 나는 망했다. 연애는 다했다’ 하지 마세요. 안절부절못하는 바로 그 지점의 자신을 똑바로 보겠다는 결단은 언제나 늦지 않은 선택이며, 온전한 나 자신으로 향하는 첫발입니다. -78~79
나의 한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오빠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참아 주면 결혼하기 전까지는 변할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니라는 거죠. 사람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변하지 않을 그(그녀)를 나는 얼마만큼 수용할 수 있는가, 숙고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이렇게 했을 때 책임의 한계 또한 명확해집니다.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단언컨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이처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에 능숙해질수록 더 자유롭게 연애할 힘이 길러질 것입니다. 자유의 힘은 ‘의지적 선택’이라는 근육을 통해 길러질 수 있 습니다. 나 자신이 되어 선택할 수 있을 때 연애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됩니다. 한 번의 연애를 지속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 삶의 주인 되어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94
나는 진정 어떤 사랑, 어떤 섹스를 원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여성의 경우라면 임신이 여자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더욱 냉철하게 생각할 일입니다. 내 몸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철저하게 고려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일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 돼요 돼요 돼요~ 하면서 마음에서 원치 않는 데이트 방식을 반복하며 죄책감과 남모르는 불안에 머물러 있지 맙시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의 선택 역시 어른의 태도, 즉 어떤 책임도 감수하겠다는 의지적 선택이 되어야겠지요.
사랑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더 깊은 스킨십을 원하는 불타는 욕구를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욕구에 압도되는 것과 욕구를 인정하고 한발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큰 차이입니다. 후자의 태도가 전제되어야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 행사가 가능해집니다. 여러분 자신이 되어 그 황홀한 선물인 성을 거침없이, 두려움 없이 누릴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141
‘이상형이 어떻게 돼?’ 하며 대상을 묻는 것보다 ‘나의 사랑 능력은 몇 레벨일까?’로 더 쉽게 바꿔 보면 어떨까 요? 이상형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감내할 수 있을지, 즉 무엇을 가장 못 견디는지 알고 있나요? 대화가 통하는 것도 중요하고, 부부가 함께 신앙의 동역자가 되는 것 역시 바라는 바고, 우리 엄마와 가족을 좋아하는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이 중에서 어떤 조건이 결여되었을 때 나는 가장 힘들까요? 또는 경제적 결핍 감을 견디는 것이 어려운가요, 신앙적인 소통 없는 관계가 더 힘겨운가요?
내가 못 견디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이상형을 아는 것보다 더 유익한 앎일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랑을 성공하게 하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나, 나 자신의 사랑하 는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형이 어떻게 돼? 참 좋은 질문입니다. 누가 물어 주지 않아도 이런 의미를 담아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볼 만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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