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묻고 새로 이룬 가족을 잃고 그리고 직장에서마저 쫓겨난 그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지리산으로 온 것은 그러니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는 누군가 버리고 간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에서 삶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그는 “밥을 주면 밥을 먹고 돌을 던지면 돌을 맞으며” 첫 3년을 버틴다. 그는 그 3년 동안 굶어 죽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고 했지만 나는 안다. 그곳이 지리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가끔 그에게 편지가 왔다.
“두 끼를 굶었어. 지난밤에는 피아골의 나무가 소식을 보내왔지. ‘나 절정이야. 혁명도 없이 희망도 없이 내 몸은 곧 절정이야…….’ 밤새 단풍나무 벗 삼아 게임 고스톱을 치다 보면 낙엽들이 ‘낙장불입, 낙장불입’ 하고 떨어지네……. 때 이른 단풍 하나 주우려다 보니 인생이 낙장불입인 거 같아……. 생각해보면 길을 잃었다고 뭐가 그리 대수일까, 잃어버렸다고 헤매는 그 길도 길인 것을.”
---「낙장불입 1」중에서
최도사와 버들치 시인은 친구 사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둘 다 교통수단이 없었고 자가용이 아니면 닿지 못하는 산골에 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둘은 마음으로 서로를 아끼는 사이였다. 한번은 시집을 낸 버들치 시인이 돈이 조금 생겼다고 최도사를 초대했다. 두 사람으로서는 다 너무도 귀한 일인 외식을 하러 간 것이다.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두 사람은 그 만남을 위해 하루에 서너 번밖에 없는 버스 시간을 헤아려 버스를 타고 그러고도 먼 길을 걸어 반갑게 만났다. 버들치 시인이 식당으로 최도사를 데리고 가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맛있는 거 먹어. 오늘 나 돈 많아.”
그러자 최도사는 한동안 메뉴판을 쏘아보았다. 시골 식당이 그렇듯 없는 게 없는 식당이었다. 육개장 5,000원, 설렁탕 5,000원, 자장면 3,500원, 냉면 4,000원, 떡볶이 2,000원, 사리 1,000원……. 최도사는 한참을 망설이며 입맛을 다시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의기양양하게 주인에게 말했다.
“난, 사리!”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는 버들치 시인이 주인보다 더 당황하며 그건 안 된다고 하자 최도사가 다시 말했다. “글쎄, 사리가 무슨 음식인지 몰라도 적어놨으면 팔아야지……. 시인이 무슨 돈이 있어! 난 사리야! 그냥 내비도!”
---「‘내비도’를 아십니까」중에서
“여보, 당신 전에 화개장터에 책방 하나 내고 싶다고 했지. 엄선된 30권만 놓고 파는 책방.”
낙시인은 빙그레 웃었다. 정말 그의 꿈은 딱 30권만 놓고 파는 책방이었다. 그 대신 그가 읽고 정말 소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책이어야 했다. 대신 차는 공짜란다. 그러자 알피엠이 말했다.
“당연히 장사가 안 되겠지? 집세만 나오면 되지 뭐. 당신은 거기에 책상 하나 갖다 놓고 천천히 시를 쓰고……. 그러니 내가 그 책방 바로 옆에 식당을 내겠어.”
낙시인이 잠시 생각하다가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났다. “당신이 식당을?”
“응, 여보. 우리나라 식당들은 너무 반찬을 많이 줘. 사람들이 부담스럽잖아. 모두가 집 밥처럼 먹을 수 있도록 약간 타거나 선 밥에 신김치, 졸아붙은 된장찌개, 이런 거를 주 반찬으로 하는 거야. 얼마나 소박해, 그 이름은 ‘성의 없는 부인 식당’이야.”
“대박이다! 대박이야.” 낙시인이 웃었다. 거기에는 약간 어이없음이 있었는데 알피엠 여사의 눈은 꿈에 부풀었다.
---「‘섬지사 동네밴드’ 결성 막전막후」중에서
우리는 ‘소풍’에 앉아 찬 맥주를 마셨다. 당연히 우리가 내야 할 돈인데 주인은 실상사 앞 슈퍼에 가더니 맥주를 그냥 들고 왔다. 월말 일괄 계산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마시면 돌아갈 때 운전은 누가 해?’ 나는 궁금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만 마시고 가자’고 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저녁이 되어서 내가 낙시인에게 묻자 낙시인은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이 “이곳은 잘 데가 천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소풍 주인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온 지 10년, 무엇이 변했는지 한번 돌아보았죠……. 시간, 시간이었어요. 서울에서의 시간은 내 것이 아니었는데 이곳에서의 시간은 내 것이에요. 이게 제일 큰 변화더라고요……. 조각을 하고 싶으면 하고, 팥빙수를 팔고 싶으면 팔고 가게를 닫고 몇 개월씩 순례를 떠나고 싶으면 떠나죠. 지리산은 참 이상해요. 누가 와도 어울려요. 조선백자처럼요. 조선백자는 베르사유 콘솔에 올려놓아도 시골집 뒤주에 놔둬도 어울리잖아요. 중국의 자기도 일본의 도자들도 그렇지는 못하죠. 지리산은 백자처럼 누구라도 품는 그런 산인 거 같아요.”
---「‘소풍’ 가실래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