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라스 쉬프의 두 번째 ‘골드베르크 변주곡’
2003년 12월 코다클래식 배민근
2003-12-01
1970년대 초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을 졸업한 세 명의 젊은 피아니스트 중 맨 먼저 오스트리아의 빈에 정주한 것은 안드라스 쉬프였다. 졸탄 코치슈가 드뷔시와 라흐마니노프 같은 근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그리고 데즈 랑키가 베토벤과 바르토크 사이의 연결고리를 탐색하고 있을 때 그는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로 유럽 고전음악의 심장부를 겨냥했다. 그리고 런던에서는 조지 말콤으로부터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 음악을 배웠다. 헝가리의 국영 레이블인 헝가로톤을 통해 발매된 바흐의 ‘반음계적인 환상곡과 푸가’나 스카를라티 소나타집은 바로크 레퍼토리에 대한 쉬프의 기질적인 친화력을 잘 보여 주지만, 말콤과의 수업이야말로 오늘날 바흐 해석자로서 그가 누리는 명성과 권위의 진정한 시금석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스위스 바젤에서 라이브로 녹음된 이번 음반이 쉬프에게 있어서는 두 번째 ‘골드베르크’(ECM)다. 익히 알려진 대로 데카의 구 녹음(1982)은 우아한 기품과 생동감 넘치는 데코레이션으로 ‘피아노로 연주된 가장 아름다운 골드베르크’라는 찬사를 받았다. ECM 레이블은 그 음악적인 분위기와 물리적인 환경 모두에 있어 데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래서인지 20년 만에 찍은 스냅 샷에서 모종의 획기적인 ‘변신’에 대한 팬들의 은근한 기대심리도 없진 않았지만, 해석과 연주의 전체적인 밑그림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쉬프의 바흐 연주가 지니는 가치를, 피아노라는 악기를 사용함으로써 얻어지는 독자적인 표현의 영역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이 곡을 하나의 ‘다채로움의 경연장’으로 몰고 가려는 순진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비록 쉬프의 새로운 녹음이 ‘비인 풍’의 이미지에 걸맞는 수렴지점으로부터 바로크와 현대라는 양 갈래 방향으로 분열하는 듯한 징후를 보인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대위법이라든가 성격 변주들을 잘 연주하기 위한 폭 넓은 양식적 이해, 절제된 울림으로 인한 여백을 장식음으로 치장하는 방식에 관한 쉬프의 기본적인 관점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관심의 대상이 될만한 변화된 부분들을 보자. 우선 타건과 음색의 경우 구 녹음에서 들려 준 곡선적인 율동미에서는 한 걸음 물러선 듯 명확하고 약간은 서늘하다. 그래서 전반부 변주들에 아로새겨진 개성적인 장식음과 트릴들은 수사법이 아닌 ‘문체’의 변화로 감지될 만큼 명징하다. 게다가 21번 변주와 사랑스러운 ‘쿠오들리베트’를 비롯한 몇몇 변주들은 이전과는 판이할 정도로 단호하게 연주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각 변주들의 상위에 있는 내러티브에 더 많은 긴장과 개연성을 부여한다. 28번 변주의 자유롭게 이완된 템포에 얹힌 시적인 유영과 곧바로 이어지는 29번 변주에서 오른손의 명료한 진행과 아티큘레이션이 빚어낸 콘트라스트는 사뭇 진지하고 도전적으로 다가온다. 선율, 화성, 리듬 등 다양한 요소에 걸친 변주와 변주 사이의 연결고리는 이 거대한 ‘아리아와 변주’에 대한 쉬프의 중요한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다. 새 녹음에서 그는 이 점을 한층 심화시키면서 동시에 해석의 주된 기조로까지 부각시켰다.
몇 마디 사족을 붙여보자. 제일 반가운 소식은 2004년을 맞아 쉬프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를 선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운이 좋으면 그가 연주한 쇼팽의 전주곡 Op.28의 영상물을 구할 수도 있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피아니스트로서보다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로 북미 대륙 투어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에 다다르면, 정말이지 헝가리인들의 그 ‘지휘자 기질’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와 환상곡 레코딩에서 호흡을 맞춘 일본인 바이올리니스트 유우코 쉬오카와와 결혼할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쉬프와 앙타이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2004년 2월 코다클래식 최윤구
2004-02-01
필자에게 근래 들어 가장 인상 깊은 음반은 무엇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온 쉬프와 앙타이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1982년 데카에서 이미 이 작품을 녹음한 바 있는 쉬프는 큰 그림은 변하지 않았으되 세필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라모폰은 데카의 전작이 이번 ECM 녹음에 비해 상상력과 대담함이 떨어진다고 평했는데, 필자도 이에 동감한다. 이를테면 장식음의 사용빈도가 높아졌는데 그 솜씨가 대단히 교묘해서 놀라운 곡예를 볼 때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것과 비슷한 성격의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정평 있는 EMC의 녹음팀 역시 낭창낭창하지만 홀 전체를 압도하는 깊은 울림이나 박력과는 거리가 먼 피아니스트라는 인상을 주었던 데카 녹음에서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그를 기억하게 만드는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했다. 필자는 매일 아침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쉬프의 이번 ‘골드베르크’로 아침을 시작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면 쉬프의 말마따나 ‘머릿속이 샤워를 한 듯’ 상쾌해진다.
앙타이의 두 번째 ‘골드베르크’는 필자가 지난 호에서 리뷰를 했으므로 연주 내용 외에 덧붙이자면 차세대 포맷의 필요성에 회의를 들게 하는 놀라운(우수한이 아니라) 녹음이다. 언젠가 필자가 오디오 업계 관련자를 방문하면서 앙타이가 미라레에서 처음으로 녹음했던 바흐 ‘평균율’ 1권을 들고 가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나중에 국내에서 열린 한 오디오 쇼에 참가한 그 관련자는 쇼가 열리는 내내 그 음반만 틀어놓았는데, 마니아들에게서 그 어떤 오디오파일 음반보다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