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아들의 주검을 손수 거두었을 때 할머니는 하늘을 향해 그렇게 소리치셨다. 몇 년 후 막내할아버지마저 부음을 전해왔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는 동생들을 그렇게 하나씩 앞세웠고 노년에는 문상마저도 가보지 못했다.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른다’는 옛 노래 「제망매가」의 한 구절처럼 할머니의 그런 내력에 닿으면 인생이 더없이 쓸쓸하게 여겨졌다. 그렇지 않은가. 한때는 먹고 입는 것 두고 서로 투덕거리기도 했을 것이며, 어린 손으로 동생들 낯을 씻기고, 시집갈 때는 흩어지지 말고 다 같이 살자고 이불 두르고 다짐도 했을 것이다. 그 생의 허망과 쓸쓸함을 할머니는 어떻게 견뎌냈을까? (……) 며칠 전 형이 말했다. “이제 어머니 보낼 마음 준비를 해야겠다.” 할머니가 그립고 생이 무거울 때면 들던 생각, 생의 허망과 쓸쓸함을 할머니는 어떻게 견뎌냈을까? 하는 생각이 어린 아이들 곁에 누울 때면 문득 되살아난다. 이제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제 새끼 거느린 생은 고적한 대로 앞을 보며 견뎌내는 것이며, 그렇게 생은 이어져왔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세상의 큰형들인지 모른다. ---「세상의 큰형들」중에서
알리는 것도 알리지 않는 것도 불효인 것이 부모 앞서는 자식의 부음이다. 일을 당해 보니 새삼 뼈저렸다. 자식들끼리 머리 맞대고 고민했다. 당장은 알리지 않는 게 도리라고 의견을 모았다. 전화로 알릴 일도 아니고 먼길 모셔 올 수도 없는 분들이라 차차 찾아뵙고 말씀드리기로 했다. 우리로서도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일단 장례 치르고, 그 유가족부터 챙겨놓고 봐야 했다. 시골 사는 처형은 자식이 세상 떠난 사실을 모르고 사는 노인들이 자기 동네에 여럿이라고 전했다. 믿기지 않지만 그 작은 마을에도 그런 집이 세 가구는 된다는데 미국으로 돈 벌러 갔다, 원양어선을 탔다, 그리 알고 지낸다는 거였다. 더러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부모와 소식 없이 지내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고도 하였다. 다 옛 드라마 같은 얘기였다. 그 노인네들 중에는 끝내 모르고 가는 노인네들도 있을 테고, 더러는 짐작하고도 내색 않고 사는 노인들도 있을 터였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우리는 어른들을 뵈러 갔다. 어른들의 안색을 살피고 나서 어렵게 말씀을 드렸다. 뜬금없는 소식에 노인들은 충격이 커 보였다. 그래도 우려했던 것보다는 잘 견디어주었다. 그 순간에도 자식들이 걱정할까봐 슬픔을 속으로 새기는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식들 가고 나면 두 양주는 서로 모르게 밤이면 베갯잇을 적실 것이다. 당신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는지 시름이 깊을 것이다. 한데도 약속이나 한 듯이 그 불쌍하고 무정한 사위는 끝내 들먹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