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름에는 악(樂) 자가 들어 있었다. 늘 즐겁게 살기를 바라던 조부의 뜻이었다. 아버지는 정말 즐거웠을까. 적어도 어머니만은, 아버지의 그 이름에 깊이 찔려 치명상을 입은 채로 겨우 삶을 연명했다. 날카로운 기역 받침에 가슴 한구석이 꾹 압정처럼 눌려 이따금 참지 못한 비명을 흘리곤 했다. ---「휘」중에서
누구든 누이를 쳤다. 뒤에서 혹은 앞에서 그녀를 칠 때마다 내 방 벽에 짓눌린 누이의 입술에서는 깨질 것 같은 울림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올 때마다 기도하듯 고갤 숙이고 눈을 감았다. 누이가 싫었다. 그녀의 천함이 더럽고 더러워서 더럽게 싫고, 싫고 싫어서 종국에는 내가 그녀를 치지 않게 되길 간절히 빌었다. ---「종」중에서
“나는 사람 아니야.” 한밤중에 슬그머니 마당으로 빠져나와 서성이다가 며느리가 중얼거렸다. 그러곤 알아들을 수 없는 이국의 언어로 울었다. 모든 울음은 가엽다. 며느리는 사람이 맞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106쪽, 「개」중에서
어디야? 왜 대답이 없어? 폰 잃어버린 거야? 왜 전화도 안 돼?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끝없이 물음표를 타고 물결처럼 이어지는 질문 끝에, 다시 전송 버튼을 누른다. 살아 있어? ---「못」중에서
각각의 개인이었을 아버지들은, 하나의 덩어리처럼 기억되었다. 뭉뚱그려진 아버지라는 그림 속에서 나는 정확히 세 명을 갈라낼 수 없었다. 어머니의 바싹 마른, 톡 치면 부스스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은 어깨를 쥔 아버지들의 손등 같은 것만이 잔상으로 남았다. ---「톡」중에서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깊이 가라앉고 있는지를. 불 꺼진 암흑 같은 마음속에서 어떻게 일어서야 하는지도 우리는 배운 적이 없었다. 더 이상 뉴스에서 기대하는 소식을 듣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람들은 불처럼 번지는 마음속 분노와 설움을 잊기 위해서 불에 탄 부분을 싹둑 잘라냈다. 평소처럼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기 위해서는 더 이상 연명하는 데에 쓸데가 없고 타기 쉬운 말랑한 부분부터 잘라내야 했다. 그중 하나가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