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정계의 가장 큰 변화는 중앙 정계에 사림 세력이 진출한 일이다. 고려말의 정몽주나 길재의 학풍을 잇는 이들은 스스로 도학적 실천을 구현하는 군자임을 내세우며 사회의 일대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이 김종직이였다. 김종직은 경상도 밀양 출신으로 1453년 전사가 되고, 1459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1462년에는 승무원 박사가 되었다. 이후 경상도병마평사, 이조좌랑, 함양군수 등을 지내고, 성종이 성년이 되던 1476년에는 고향인 선산의 부사로 재직중이었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성종이 정사를 주관하게 되자 중앙으로 진출하였으며, 이때부터 영남 사학의 거두로서 또한 성종의 근위 세력으로서 성장하게 된다. 성종은 학문을 숭상하여 도학 정치를 꿈꾸었으며, 김종직을 자신의 그런 정치적 이념을 뒷받침해줄 적임자로 생각했다.
--- p.143
연산군이 반정에 의해 쫓겨난 왕이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악행에 대한 것만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연산군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단적으로 '폐륜적 행위를 일삼은 폭군'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 또한 연산군에 대한 동정론을 펴는 사람들은 흔히 조선왕조사에 또 한명의 폭군으로 기록된 광해군과 비교하려 들지만 이 또한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광해군은 정치 역학의 희생자인데 반해, 연산군은 인륜과 민심을 배반한 독재자였기 때문이다.
--- p.162
세종 대가 이와 같은 빛나는 유산과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을 훌륭하게 보필한 신하들과 학자들의 노력도 간과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세종이 이들의 보필을 수용할 만한 인격과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유교와 유교 정치에 대한 깊은 소양, 다양하고 깊은 학문적 성취와 탐구력, 역사와 문화에 대한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 문화에 경도되지 않는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시키는 추진력과 신념, 백성과 신하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인간애 등을 고루 간직했던 세종의 뛰어난 인성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학문적 업적을 일구어내는 구심체였다.
--- p.65
말하자면 조선은 우리가 쉽게 단정하듯이 지극히 폐쇄적이고 고리타분한 그런 사회가 아니라 대단한 정열과 무게가 내재되어 있는 깊이 있는 세계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머리말 중에서
따라서 연산군의 폭정은 왕권의 강화라기보다는 왕권을 볼모로 한 독재의 강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연산군에 대한 동정론을 펴는 사람들은 흔히 조선왕조사의 또 한명의 폭군으로 기억된 광해군과 비교하려 들지만 이 또한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광해군은 정치 역학의 희생자인데 반해, 연산군은 인륜과 민심을 배반한 독재자였기 때문이다.
--- p.
단종 복위 사건을 주도한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사람에 대해 중종대의 사림파들은 왕을 위해 충절을 지킨'사육신'으로 추앙했으며, 또한 이때 세조에게 한평생으 벼슬을 하지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킨 김시습, 원호,이맹전,조려, 성담수,남효온 등을 사육신에 대칭하여 '생육신'으로 높여 불렀다. 이중 남효원은 사건 당시 불과 두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장하여 세조의 부도덕한 찬탈 행위를 바난함으로써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 p.105
내가 굳이 이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으려고 한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조선사와 왕들에 대한 지식이 잘못되어 있거너 편협하다는 것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해방이 된지 50년이 지났는데도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조선왕조사 조차 제대로 책으로 묶어놓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p.머리말
--- 머리말 중에서
그러나 숙종은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민씨 폐위사건에서 보듯이 애증의 편향이 심하여 그것을 정치 쟁점화시켜 당쟁을 격화시키는 흠을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의 통치 전반을 평가해볼 때 왕권 강화를 위해 고의적으로 반복하였던 환국 정치의 일면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결과만을 놓고 볼 때 그는 외척과 아내까지도 철저하게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 p.332 중에서
그날 이후 나는 약 1개월간에 걸쳐 조선 종묘사에 관련된 내용들을 집중적으로 찾아보았다.그러면서 나는 점차 백과 사전에 기록된 내용들이 너무 부실할 뿐만 아니라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내가 굳이 이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으려고 한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조선사와 왕들에 대한 지식이 잘못되어 있거너 편협하다는 것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해방이 된지 50년이 지났는데도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조선왕조사 조차 제대로 책으로 묶어놓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 p.머리말
16세기의 조선은 전통적인 붕당관과 성리학의 붕당관이 엇갈리고 있었다. 훈척 세력은 한, 당대의 붕당관에 바탕을 두고 사림의 세력 결집을 비판하는 동시에 탄압의 구실로 삼았으나, 사림계는 구양수의 붕당론에 근거하여 권세로써 정권을 독점하는 훈척 계열을 '소인의 당' 이라고 비난했다.사림 세력은 선조 대에 이르러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고 구양수의 붕당관에 따라 당파를 조성하기에 이른다. 이의 시초가 바로 동인과 서인이었따. 주리론자들로 구성된 동인과 주기론자들로 구성된 서인들의 정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극한적인 대립 양상을 띠게 된다.
--- p.234-235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선사회에 대해 매우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조선은 우리가 쉽게 단정하듯이 지극히 폐쇄적이고 고리타분한 그런 사회가 아니라 대단한 정열과 무게가 내재되어 있는 깊이 있는 세계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세계 속에 새로운 어떤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우리는 미처 그 점을 발견하기도 전에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과 그 이후 강제된 서구문영으로 인해 너무나 쉽게 그 세계를 놓쳐버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 p.머리말중에서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선사회에 대해 매우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조선은 우리가 쉽게 단정하듯이 지극히 폐쇄적이고 고리타분한 그런 사회가 아니라 대단한 정열과 무게가 내재되어 있는 깊이 있는 세계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세계 속에 새로운 어떤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우리는 미처 그 점을 발견하기도 전에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과 그 이후 강제된 서구문영으로 인해 너무나 쉽게 그 세계를 놓쳐버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 p.머리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