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때 예상 밖의 갑작스런 시력 저하가 찾아왔으며, 그로 인해 3학년 때는 실패하지 않는 모든 경우의 수가 20%라는 두 번의 위험한 수술을 거쳤는데, 겨우 안정을 찾아갈 때쯤 평소 아무 병도 없으셨던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수술 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4학년이 되자 망막의 광각세포 손상이 나타나면서 야맹증이 시작되었는데, 어느 날 밤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다가 사고가 나는 바람에 다리뼈에 금이 가고 인대가 손상되어 피아니스트를 직업으로 삼을 수 없게 되었다. --- p.37
-대학이란 곳은 또 다른 문제들로 저를 힘들게 했지만, 그래도 그런 일들은 나름대로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것들이었기에 맞서고 설득하고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스릴과 성취감도 맛볼 수 있었으며 그래서 행복하기도 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고, “네가 할 수 있겠니?”라고 묻는 교수님들의 우려를 노력으로 잠재워가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늘 그런 질문을 듣고 그 의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삶 자체가 되어버리다 보니,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은진슬’이라는 존재를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고 또 피아노를 쳐야 한다는 것이, 그래서 A학점을 받아야만 그 집단에 속할 수 있다는 슬픈 현실이 힘들기도 했습니다. --- p.77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피아노를 더 이상 잘 연주할 수 없는 무능력하고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피아니스트로서의 내 미천한 경험이나마 잘 살리고 종합하여 반주도 하고 좋은 음악회를 기획하고, 좋은 음악을 하려는 사람들을 돕는 사람의 좀더 유연한 시각으로 나를 정의하기로 했다. 욕심을 버리니 마음이 편해졌고, 이제는 내 아픈 첫사랑을 대면하는 것이 조금씩 덜 고통스러워지는 것도 같았다. --- pp.125~126
-내가 팔짱을 끼는 순간, 우리의 보스 아저씨 갑자기 온몸이 경직되고 얼어버리시며 하시는 말씀. “아. 저, 아무래도 다른 여직원을 불러와야겠는데….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이러시는 거다. 얘기치 못한 보스 아저씨의 반응에 아저씨보다 더 당황한 나는 “이건 시각장애인 안내 자센데요. 그리고 누굴 불러오실 건데요? 다른 직원이 없어서 나오신 거 아니었나요?”라고 드디어 조금 화가 나서 말했다. 보스 아저씨는 한참을 더 떨떠름해 하셨으나 나의 다소 날카로운 지적에 마지못해 가시려던 걸음을 멈추고 날 안내하기로 결정하셨다. --- p.241
-나는 더 이상 회사에 다니지 못한다고, 남들만큼 돈을 벌 수 없다고, 일반적인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했기 때문에 엘리트 친구들에 비해 열등하다는 자기 연민과 멍청한 생각을 그만두었다. 비자발적이나마 삶이 나에게 자신의 역할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한 진화의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자랑스러운 ‘백조’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