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행성 위에 살기 위해서는 문제들이 항상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은 문제들과의 투쟁을 통해서 오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해서 우리의 여정에 계속해서 오는 특별한 문제를 알 필요가 있다. 그 특별한 문제는 우리에게 살기 위해 주어진 사회 제도의 문제들을 참아 내는 데 우리가 익숙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고, 또한 가능하다 할지라도 더욱 훌륭하고 더욱 높은 사회 제도와 더불어 오게 될 이 새롭고 친숙하지 못한 문제들을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 따라서 우리는 저급하고 죽어 가는 제도에 묶여 있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어려움을, 우리의 진정한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더 새롭고 더 나은 문제들이 가능하다면, 그 변화로 나아가 그런 문제들과 맞붙어 싸워서 그것들을 해결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지성이 감당해야 할 과제이다.
인간의 삶에서 사랑이 충분히 꽃피지 않는 한, 그는 삶의 영광과 장엄함을 얻을 수 없을 것이며, 그는 빛을 잃은 채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이 없는 삶은 우둔하고 메마르다. 그것은 정말로 사막이다. 그래서 나는 문제들로 꽉 찬 에너지와 열정으로 가득 찬 삶이 둔하고 쓸쓸하고 죽어 버린 삶보다는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 작은 일화로 이 토론을 결론짓고 싶다.
작은 다발의 들풀들이 낡은 도시 벽의 갈라진 틈에서 보호받으며 살고 있었다. 그들이 높은 벽의 갈라진 틈에 의해 완벽하게 보호받았기 때문에 바람과 폭풍우도 그들을 방해하지 못했다. 똑같은 이유로 햇빛도 그들을 태울 수 없었고, 폭우 또한 그들을 다치게 할 수 없었다.
이 작은 다발의 들풀 이웃에 장미덩굴이 있었다. 아름다운 장미꽃이 있음으로 인해 이 들풀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를 열등하게, 그리고 부끄럽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느 맑은 날 아침에 이 들풀들은 신께 기도했다. “우리는 얼굴 없는 꽃으로 살 만큼 살았습니다. 이제 저희를 장미로 바꿔 주십시오.”
신은 그 물음에 답했다. “어찌하여 불필요한 곤란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가? 장미의 인생은 매우 험난하다. 폭풍이 몰아치면 그것은 폭풍으로 인해 뿌리째 흔들린다. 꽃이 필 때면, 그것을 꺾으려 주위에 이미 누군가가 와 있다. 너는 안전하게 보호받는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을 저버리지 말라.”
그러나 들풀들이 계속 주장하였다. “우리는 오랫동안 보호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위험스럽게 살고자 합니다. 24시간 동안만이라도 우리를 장미로 있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다른 들풀들이 소리쳤다. “정신 나간 소리 마세요. 우리가 듣기로 우리의 몇몇 조상들이 장미가 되겠다는 이런 열망 때문에 심각한 고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종족의 경험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요. 우리는 장미가 되려는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작은 식물은 다시 말했다. “저는 별들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폭풍들과 싸우고 싶습니다. 저는 폭우 속에서 숨쉬고 싶습니다. 저는 장미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국 신은 양보했다. 어느 맑은 날 아침, 이 작은 들풀 다발은 장미가 되었다. 그리고 즉시 그의 시련과 고난들의 영웅담이 시작되었다. 폭풍우가 와서 그것의 뿌리를 흔들었다. 폭우가 와서 그것을 물 속에 잠기게 했다. 한낮의 태양이 그의 꽃잎들을 불태우는 고통을 주었다. 그는 모든 순간에, 모든 방면에서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다시 한 번 다른 나이 많은 들풀들이 그 새로 태어난 장미 주위에 모여들어 말했다. “우리가 너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했다. 너는 말을 듣지 않았다. 너는 너의 오래 전의 삶이 얼마나 안전했는지 알지 못하는가? 그것이 그것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하더라, 그것들은 오래되고 친숙한 문제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익숙해있다. 그것은 괜찮았다. 너는 너의 삶에 얼마나 많은 혼란들을 만들었는지 알기나 하니?”
이에 이 갓 태어난 장미는 말했다. “당신은 어리석다. 그 높은 벽으로 인해 보호받으면서 살아 가는 작은 들풀로 오랫동안 안전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24시간 동안만이라도 위험한 삶을 살아보는 것이 더 낫다고 나는 말한다. 폭풍 속에서 숨을 쉬고 그리고 바람과 싸우는 것은 위대했다. 나는 태양과 얼굴을 맞대었고 별들과 이야기했다. 나는 내 영혼을 성취했고, 나는 너무나 만족한다. 나는 완전히 살았고, 그리고 나는 완전히 죽으려 한다. 당신의 삶에 관한 한, 당신은 살아 있는 죽음을 살고 있다.”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크리슈나에게 어떤 차이도 만들지 않는다.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는 쉽게 돌아갈 수 있다. 그는 그 자신을 매 상황, 즉 사랑과 애착, 성냄과 분노 속에 남을 수 있다. 아무것도 그의 텅 빔, 그의 고요를 깨뜨릴 수 없다. 그 무엇이 오고가더라도 그는 아무런 어려움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텅 빔은 긍정적이고 완벽하며, 살아 있고 역동적이다.
그러나 그것의 경험에 관한 한, 당신이 붓다의 텅 빔으로 가든 혹은 크리슈나의 텅 빔으로 가든 그것은 동일하다. 둘 다 당신을 희열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나 붓다의 텅 빔은 당신에게 이완과 휴식을 가져다 줄 것이지만, 크리슈나의 텅빔은 당신을 거대한 행위로 데려갈 것이다. 만약 우리가 ‘능동적 공(空)’이라는 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크리슈나의 텅 빔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말이 될 것이다. 붓다와 마하비라의 텅 빔은 ‘수동적 공’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희열은 둘 다에 공통적으로 있지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능동적 공의 희열은 창조적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희열은 그것 자신을 위대한 공 속에 녹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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