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 이후 왕위를 이을만한 인물이 존재 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우선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와 그의 손자 김춘추가 있다. 그 다음 으로는 선덕여왕의 남편인 음갈문완을 꼽을수 있다.그렇다면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왜 '성골남진'이라고 했을까 하는 으의문이 든다. 다시말해 용수나 용수의 아들인 김춘추가 아니라 .......(중략)
--- p.15 여성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배경 그 첫번째 선덕여왕중에서...
분황사는 그 규모로 볼 때 1년 내지 3년 정도의 공사 기간이 소요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므로 진평왕 말년이나 선덕여왕 초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선덕여왕 3년에 완공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절을 지을 때 동원된 인력은 석공 200여 명과 기타 건물을 짓는 인부 100여 명을 합쳐 모두 300여 명 정도 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창건에 소요되는 비용은 모두 국가에서 부담했다.
그런데 분황사와 관련하에 재미있는 사실은 그곳에 세워졌던 모전석탑에서 나온 유물이다. 1915년에 일본인들이 이 탑을 수리하다가 2층과 3층 사이에서 돌로 만든 사리함을 발견했다. 당시 이 사리함 속에는 옥으로 된 장신구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이 담겨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리함에는 불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공양품이나 유물을 넣는다. 또는 사리를 봉안할 때 탑을 세운 사람의 소망을 담아서 사리와 함께 넣기도 하는데 이 모전석탑의 사리함에는 아주 독특한 유물이 나왔다. 실패와 바늘통을 비롯한 각종 바느질 용구가 출토된 것이다. 이 출토품들은 그 유례가 매우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물품은 금바늘과 은바늘이다. 이러한 바늘은 이전에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공양물이다. 금이나 은이라는 재질로 보아 일반인이 사용하는 용품이라기보다는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왕실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분황사 모전석탑이 선덕여왕의 발원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라면 이 물건과 여왕의 관련성은 깊다고 생각된다. 만약 이러한 유물이 여왕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사찰의 이름도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분황사(芬皇寺)는 '향기로운 황제의 사찰'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사찰의 이름 자체가 여왕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 pp.45-46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물음은 우리 역사에 존재했던 여왕이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각자의 마음 속에서 여왕을 어떻게 보며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이는 결국 독자의 몫이 될 것이다.
--- p.111
강의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여왕에 대하여 알려고 하면 할 수록 여왕의 왕위 계승이나 여왕과 관련한 의문점들이 점점 더 쌓여가기만 했다...
이에 필자는 여왕과 관련된 모든 논문을 섭렵했다. 선덕, 진덕, 진성 여왕 등 세 여왕에 관해 조금이라도 언급된 것이 있으면 지나치지 않았다. 물론 그 가운데서 취할 부분도 있었지만 버릴 부분도 적지 않았다.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 연구 성과들을 취사선택한 후 필자의 생각도 첨가하여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역사에 존재했던 세 여왕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잘 알게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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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덕영왕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나가기 위해 제도를 개혁한 만큼 전적으로 당의 제도를 본떠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던 듯하다. 따라서 651년의 전반적인 관제개혁에서도 3성 6부제를 채용하지 않았고 신라 고유의 관명도 고수해나갔다. 그러므로 한화정책이라고는 하나 한화 정책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로써 진덕 여왕은 선덕여왕과는 차별화된 통치를 하면서도 제도 개편의 독자성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 이렇게보면 선덕여왕이 여러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신라 왕실의 남녀 관계에는 어떤 원칙이나 원리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왕이 용춘과 용수 형제를 차례로 가까이 했다고 해서 황음하다거나 이상하게 뵬 필요가 전혀 없다는 얘기다.
~ 진성여왕이 위홍과 사통한 것은 사통 그 자체보다는 당시 위홍이 경문왕가의 실질적인 주도자였다는정치적인 측면이 더욱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 p.57-58, p.72-74
~ 진덕영왕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나가기 위해 제도를 개혁한 만큼 전적으로 당의 제도를 본떠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던 듯하다. 따라서 651년의 전반적인 관제개혁에서도 3성 6부제를 채용하지 않았고 신라 고유의 관명도 고수해나갔다. 그러므로 한화정책이라고는 하나 한화 정책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로써 진덕 여왕은 선덕여왕과는 차별화된 통치를 하면서도 제도 개편의 독자성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 이렇게보면 선덕여왕이 여러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신라 왕실의 남녀 관계에는 어떤 원칙이나 원리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왕이 용춘과 용수 형제를 차례로 가까이 했다고 해서 황음하다거나 이상하게 뵬 필요가 전혀 없다는 얘기다.
~ 진성여왕이 위홍과 사통한 것은 사통 그 자체보다는 당시 위홍이 경문왕가의 실질적인 주도자였다는정치적인 측면이 더욱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 p.57-58, p.7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