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베를린 시내를 관통하여 저 멀리 호텔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쾅!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리자 아인리히가 급정거했다. “뭐야?” 놀란 그가 두리번거리는 사이 준범의 시선이 한쪽에 고정됐다. “저기입니다.” “음.” 시선을 옮겨 바라본 아인리히의 표정이 무겁게 변했다. 가로수를 정통으로 들이받은 차량 탓이다. 화르륵! 엔진 부분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이대로 놔두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행인 건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 휴대폰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저기서 신고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바라보는 아인리히의 얼굴이 씁쓸했다. “어떻게 할까요?”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뭐, 사람 많으니까 잘 처리하겠죠.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끄덕. 준범이 고갯짓을 하자 아인리히가 서서히 차를 출발시켰다. 그때 준범의 귀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엄마!” 놀라고 당황한 아이의 울먹이는 소리가 준범의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빠르게 고개를 돌려 어디서 난 소리인지 확인해 봤다. “엄마.” 다시금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 그 소리를 추적해 들어가자 방금 사고가 난 그 차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분명했다. 동시에 떠오르는 어릴 적 사고의 기억. 그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잊히지 않은 일이었다. 표정이 급속도로 가라앉은 준범이 거의 끊어질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스톱.” “네?” “멈추세요.” 준범의 스산한 억양에 아인리히가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차가 멈춰 선 순간 준범은 그대로 뛰쳐나갔다. “준범 씨!” 뒤에서 아인리히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준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 타다닥! 사고 현장에 도착하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거기서 얼마나 멀다고 10분이나 기다리래?” “어째, 저걸 어째.” 개중에 몇몇 사람들은 차 문을 열려고 시도하고, 불길을 잡느라 분주했다. “끙! 좀!” 안간힘을 쓰며 문짝을 떼어 내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발화점인 엔진 부분도 불길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팡! 팡! “제발! 좀 꺼져라!” “공업용 소화기 좀 찾아와요!” 기름으로 붙은 불이라 옷가지로 내리쳐 봐야 소용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불만 더 키우는 꼴이었다. 펑! 두 번째 폭발음이 들리더니 불이 더욱 솟구쳤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식겁하며 뒤로 몸을 뺐다. “피, 피해!” 타다닥! 사람들이 자리를 피하자 화마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사람들의 낯빛이 어둠으로 물들어 갔다. “구조대 오려면 멀었어?” “제발.”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꼭 모으고 눈을 감는 사람들이었다. 그때 그 요란한 아우성 사이로 끊어질 듯 또다시 가녀린 목소리가 준범의 귀에 스며들었다. “엄마, 아빠, 무서워요.” 순간 준범의 눈빛이 예리한 빛을 뿜으며 자동차 속을 살폈다. 뒷좌석에 다섯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꼼짝도 못한 채 있었다. 이마에 흐르는 핏물, 두려움으로 가득한 눈망울,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앞좌석에 앉은 엄마의 옷깃을 잡은 모습까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닿지 않는 부분들까지도 준범은 낱낱이 파악했다. 뚜벅. 뚜벅. 준범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저절로 차를 향해 걸어갔다. 옆에 있던 피부가 하얀 중년인이 준범의 어깨를 잡아챘다. 턱! “이봐요! 위험해요!” “놓으세요.” “위험하다니까!” “놓으라고!” 준범의 험악한 기세에 그가 움찔했다. 준범은 개의치 않고 그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사고가 난 차량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