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이 바람을 맞아도 큰 바람을 맞았다. 보통 바람이 아니라 대형 태풍급 바람이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고 475년 동안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던 왕王씨 왕조가 무너졌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람을 맞아도 원상회복이 어려운데 천지조화를 받은 바람을 맞았으니 개경은 망가지는 일만 남았다. 수창궁에 들어앉은 이성계는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정도전이 신생국을 설계하고 왕자와 개국공신, 그리고 그 자제들이 왕륜동에 모여 충성을 맹세해도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려 유민과 고려에 충성하는 유생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라진 고려 왕조에 연민의 정을 보내고 있는 백성들의 질시의 눈초리가 따가웠다. --- 이성계의 고민 중에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하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기가 서립니다.” 딱 한마디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민 대감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니, 하공? 그게 정말이오? 당치않은 얘기 하지 마시오.” 외마디 소리를 지른 민 대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하륜의 말이 정말이라면 기쁜 일이 아니라 삼족이 멸할 흉사다. 지금 개경에 왕王씨 말고 왕기를 받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민 대감의 고성에 마당에서 잔치음식을 먹던 하례객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내, 못 들은 것으로 할 터이니 그런 소릴랑 당최 입 밖에 내지 마시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민 대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륜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꼬마 신랑 방원 중에서 군권까지 방원에게 준다는 것이다. 왕이 군권까지 내주었으니 허수아비의 길로 들어섰다. 어쩌면 등극 그 자체부터 식물 임금이었는지도 모른다. 권력이 빠르게 재편되었다. 좌정승에 성석린, 우정승에 민제가 발탁되었다. 민제는 방원의 장인이고 하륜의 친구이다. 방원이 세자의 신분으로 사냥을 나갔다. 문무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호종했다. 조정이 텅 비어 국사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호곶壺串에서 매를 놓고 사냥하는 흥겨운 놀이였지만 군사 수백 명이 뒤따랐다. 이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자리를 내놓지 않고 버티고 있는 정종 임금에 대한 무력시위였다. --- 올라가는 길 중에서
아버지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휴전이란 절충도 있지만 전쟁은 승리를 위한 싸움이다. 전쟁은 승패가 갈린다. 승리가 담보될 때 공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양녕은 아버지를 향하여 선전포고를 할 때 승리가 아닌 패배를 위한 포고였다. 세상이 패배라고 단정하는 그 패배가 곧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녕이 패배가 곧 승리라고 생각하는 역설적인 패배에는 두 마리의 토끼가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효도와 자신의 해방이다. 부왕의 관심과 총애가 충녕에게 쏠리고 있는 것을 일찍이 감지했다. 학문적으로나 사리판단 능력에 있어서 충녕이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의중을 흘리는 아버지의 생각에 양녕은 동의하지 않았다. 학문은 닦으면 되고 능력은 배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럴 자신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