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가는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법이니라. 왜 그런지 이치를 아느냐?” 언젠가 대원군이 하늘을 나는 새를 가리키며 물었다. 채선이 잠자코 있자 대원군이 말했다. “새는 뒤를 돌아보는 순간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 한마디가 채선의 폐부를 아프게 찔렀다. ‘뒤돌아보지 마라!’ 모든 의미를 함축한 그 한마디에 채선은 깊은 절망을 느꼈다. 채선은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바람이 원하는 곳으로 불 듯 새 또한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고 싶어 하는 게 아니냐고. 한낱 새 같은 미물도 그러할진대 사람이라면 진정 자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채선은 용기를 내어 큰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하지 못했다.
“얼씨구!” “지화자!” 흥에 겨운 관중들이 너도나도 추임새를 넣었다. 채선은 남은 대목을 혼신의 힘을 다해 불렀다. 이윽고 소리가 멎자 좌중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광경을 지켜본 신재효도 놀란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장 먼저 여인의 빼어난 자태에 놀랐고, 소리에 더욱 놀란 것이다. 분명 생김새는 여자인데 소리는 여자의 것이 아니었다. 신재효가 김세종을 향해 물었다. “어떤가? 자네가 보기에.” “처음에는 여인다운 꾀꼬리 소리를 기대했는데 예상을 크게 벗어난 소리입니다.” “나쁘다는 얘긴가?” “아니, 그 반대라 할 수 있습죠. 동리어른께서도 잘 아시면서 굳이 그렇게 묻는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자네처럼 나 역시 저 여광대의 입에서 꾀꼬리 소리가 나오리라 생각했는데 힘찬 남성의 소리가 나오다니. 여자라고 해서 반드시 꾀꼬리 같은 소리만 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놀란 건 사실이네.” “남자광대 못지않게 성량이 풍부한데다 저렇듯 미색이 빼어나니 광대의 자질로는 안성맞춤입니다. 허나 조선 팔도에 여자 소리광대는 한 명도 없지 않습니까. 모두들 남자 소리광대들인데 여자광대를 거둬 어디에 쓸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합니다.” “자네 말이 맞네만 그냥 내치기엔 저 처녀의 자질이 아까워서 해본 말일세.”
그때 기골이 장대한 사내와 포졸 둘이 득달같이 달려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네가 진채선이라는 소리꾼이 틀림없으렷다?” 사내가 채선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했다. 광현이 바짝 경계심을 드러냈다. “뉘신지요?” “대원위대감께서 너희들을 운현궁에 초청하셨다.” “대원위대감께서요?” “그렇다. 영광으로 알고 잠자코 따라오너라.” 채선은 그들을 따라가는 대신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나쁜 사람들은 아닌 듯했으나 왠지 모를 불안감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이춘구가 머뭇거리는 두 사람을 다그쳤다. “지엄하신 대원위대감의 명이거늘 뭣들 하는 게냐? 속히 따라오지 못할까!” 이춘구는 채선을 강제로 끌다시피 운현궁으로 향했다. 솟을대문 앞에 다다르자 이춘구는 채선을 앞장세우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도화춘수헌에 이른 이춘구가 안에다 대고 고했다. “대감, 분부하신대로 진채선을 대령시켰습니다.” “어서 들라 하라.”
“운현궁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죽는 날까지 소리만 하며 살고 싶습니다. 부디 선생님 곁에 있게 해 주세요.” 채선이 애절한 눈빛으로 신재효를 바라보며 간청했다. 그 눈빛에서 신재효는 자신을 향한 채선의 마음이 얼마나 깊고 진실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신재효는 눈을 질끈 감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너는 소리꾼이다. 소리꾼은 이 땅의 만백성을 위해 살아야 하느니라. 늙고 병든 내가 얼마나 살 것 같으냐? 대원위대감이 얼마나 더 살 것 같으냐?……허나 소리는 영원히 살아 백성들의 마음속에 길이길이 전해질 것이다. 채선아, 그 이치를 정녕 깨닫지 못하겠느냐?” 추상같은 질타에 광현도 채선도 고개를 푹 숙였다. “채선아, 너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나도 너를 잊을 것이니 너도 두 번 다시 나를 찾아오지 말거라.” 말을 마친 신재효는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대원군은 옥사로 향하며 착잡한 심사를 가눌 길이 없었다. 말이 엿새이지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날들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인, 난생 처음 진심으로 사랑을 느낀 여인을 옥에 가둔 처사가 과연 옳은지 무수히 반문해본 날들이었다. 그러나 과오는 뼈저리게 깨닫고 반성하지 않는 한 반드시 되풀이되는 게 상례였다. 종묘사직을 돌보는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왕실이 외척의 준동에 휘둘리고 임금이 당파 싸움에 휩쓸려 독살된 게 한두 번이 아니거늘 똑같은 과오가 끊이지 않고 반복됐던 것만 봐도 그랬다. 작금의 그 자신의 처지 또한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야금야금 세력을 키운 황후와 민 씨 일족이 장차 권력을 잡으? 이 나라 종묘사직을 좌지우지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쌍한 고종은 아무것도 모른 채 황후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황후의 얼굴이 떠오르자 참을 수 없는 역정이 일었다. “옥문을 열어라.” 옥졸이 황급히 옥문을 열자 대원군은 옥안으로 들어갔다. 채선은 눈을 감은 채 짚더미 위에 쓰러져 있었다. “형틀을 벗기고 물을 주어라.” 옥졸이 물을 가져다주었지만 채선은 마실 기력조차 없는지 일어나 앉지 못했다. 옥졸이 가까스로 물을 먹이고 나서 한참 만에야 채선은 고개를 대원군 쪽으로 돌렸다. 초점을 잃은 채선의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