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이름은 김시습, 그렇지만 누구도 아이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5세 신동’, 그것이 아이를 일컫는 말이었지요. 아이는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글을 읽고 다섯 살에 한문으로 된 시를 지었습니다.
“네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내가 불러 나라를 위해 크게 쓸 것이니, 공부하기를 부지런히 하여라.”
세종 대왕은 어린 김시습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시습은 세종 대왕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세종 대왕은 김시습이 어른이 되기 전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 이듬해 세종 대왕의 아들 문종마저 승하(임금이나 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을 높여 하는 말)하고 말았지요. 이제 열한 살밖에 안 된 단종이 왕의 자리에 올라 왕위를 빼앗으려는 무리들에 둘러싸여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김시습은 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어린 임금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어린 날 세종 대왕께서 보내 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p.10
꿈같은 결혼 생활도 잠시, 나라에는 큰 난리가 일어나 최 처녀는 도적 떼에게 잡히고 맙니다. 최 처녀는 도적들로부터 절개를 지키려다 죽게 되고, 귀신이 되어 이생 앞에 나타납니다. 두 사람은 인간과 귀신으로 함께 살아가지만 귀신은 언젠가 하늘로 돌아가야 하는 법, 최 처녀는 저승으로 돌아가며 다음과 같이 눈물의 시를 짓습니다.
전쟁터의 창과 방패가 눈앞에 가득 어지러운 곳
옥 구슬 부서지고 꽃잎은 날며 원앙새도 짝을 잃었네
어지러이 흩어진 해골을 그 누가 묻어 주랴
피에 젖어 떠도는 영혼은 하소연할 사람 없어라
슬프다. 내 몸은 무산의 선녀가 될 수 없고*
깨졌던 구리 거울 다시 갈라지니 마음만 쓰라려라
이제 작별하면 둘 다 아득하여
저승과 이승 사이 소식조차 막히리라 --- p.28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의 7년 동안 전쟁을 보고 겪으며 쓴 일기입니다. 이순신이 처음부터 일기를 책으로 남긴 것은 아닙니다. 훗날 정조 임금 시대에 이순신 장군의 모든 행적을 담은 《이충무공 전서》를 엮으면서 이순신의 일기를 함께 엮었는데, 이 일기 부분을 [난중일기]라고 이름 붙인 것이지요. 《난중일기》를 읽어 보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고 부모를 생각하는 이순신 장군의 인간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일기는 전쟁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훌륭한 역사서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전투 장면뿐 아니라, 당시의 군사 조직, 군 생활, 무기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보 76호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 p.32
허준은 조선 중기 최고의 의학자였습니다. 허준은 양반의 자식이지만, 서얼의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서얼은 과거를 보고 관직에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허준은 의술을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허준은 젊은 시절부터 전라도 지방에서 의술로 이름을 날리다가, 30세에 왕실의 건강을 돌보는 내의원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중에 허준은 임금의 건강을 보살피게 되었는데, 이때 선조 임금과 매우 사이가 가까워졌어요. 임금은 허준에게 백성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의학서를 편찬하도록 하였습니다. --- p.62
허균은 우선 왕의 신임을 얻은 뒤에, 몰래 군사들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신하들의 밀고로 허균의 계획도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포졸들이 허균의 집으로 들이닥치는 순간 허균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아니, 처음 혁명을 계획할 때부터 허균은 혁명의 실패를 예감했습니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그것이 허균의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허균은 역모를 꾀했다는 죄로 형장에 끌려갔습니다. --- p.88
조선 시대 양반들은 여러 부인을 거느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단 한 명만이 정실 부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첩이었지요. 정실 부인은 양반 집안의 딸이어야 했지만, 첩의 신분은 상관이 없었어요. 그래서 천민이나 기생들이 양반의 첩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요. 이러한 낮은 신분의 첩과 양반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서얼이었지요. 그러니까 반쪽짜리 양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조선 시대 양반들이 많은 첩을 거느린 결과, 많은 서얼이 태어났지만, 이들 모두 신분적 한계의 서러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양반의 자제로서 글을 배우고 학문을 접할 수 있었지만, 배운 바를 펼칠 수 없어 안타까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 p.91
성진은 선방(참선하는 방)에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눈을 감았어요.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여도 오늘은 좀처럼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어요. 성진은 오늘 낮에 연화봉 계곡에서 남악산의 여덟 선녀님을 만났던 거예요. 용왕의 궁에 놀러 갔다가 술을 얻어먹고 돌아오는 길에, 목욕을 하고 있던 선녀들과 마주친 것이지요. 성진과 선녀들은 잠시 농담을 나누고 지나쳤지만 성진의 마음은 알 수 없이 떨렸어요.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아도 선녀들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염불을 외워도 선녀들의 웃음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했어요.
“아, 남자로 태어났으면 세상에 나아가서 부와 명예를 얻고,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이 대장부의 삶이건만, 나는 어째서 이 산속에 들어와 세상 욕심 다 버리고 수행만 하게 되었는가?”
그때였어요. 갑자기 벼락같은 스승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지요.
--- p.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