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전쟁 발발의 조짐들 “중국 사람 허의후가 임진년 이전에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있었는데 왜노가 장차 침략할 것을 알고 몰래 명나라의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 보고문에서 일본의 용병술에 대해 말하기를 ‘…땅에서의 전투는 잘하지만 오직 함부로 죽이는 일만을 알 뿐이다. 물에서의 전투는 잘할 줄 모르고 화공을 알지 못한다. 거짓으로 강화를 요청하거나 항복한다고 속여 놓고는 적국을 깨뜨린다. 성을 쌓아 에워싸기를 잘하는데 그것으로 적의 성을 함락시킨다. 기습 공격을 가장 두려워하며 완만한 싸움을 좋아한다. 급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완만하면 침착하게 위엄을 기른다. 그들의 배는 매우 불편하게 되어 있는데, 면面은 넓은데 바닥을 뾰족하게 만들어 움직이기가 어렵기 때문에 매우 공격하기가 쉽다’라고 하였다. 이미 경험한 것을 가지고 보면 이 말은 모두 옳다. 임진년 이후 우리나라의 수군이 그 수가 적음에도 많은 적선을 쳐서 가는 곳마다 모두 이긴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지봉유설》에서) --- pp.220-221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다 백성들이 굶주리다 못해 생존을 위해 서로 잡아먹는 상황에 이를 정도로 기근은 심각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글은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에도 있어 《지봉유설》의 글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한다. 《징비록》에는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잡아먹었는데 해골만 잡초처럼 드러나 있었다”고 했다. --- p.237
폭력 속에서도 문명은 섞여 흐르고 관왕은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를 살다 간 유명한 장수 관우를 높여 부르는 말로, 관왕묘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풍습인데 임진전쟁 때 왜적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 관왕의 음덕이라며 명나라 장수 진린 등이 요청해 세우게 되었다. 1598년 남대문 밖에세운 것이 남관왕묘이고 1602년 동대문 밖에 세운 것이 동관왕묘다. 서울 지하철 1호선과 6호선이 정차하는 동묘앞역의 ‘동묘’가 바로 동관왕묘를 가리킨다. --- p.245
안남국에 울려 퍼진 이수광의 절창 7년 전 이수광과 북경에서 주고받은 시를 안남으로 돌아간 풍극관이 널리 퍼뜨렸는데, 그 시들이 그곳 선비와 유생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이수광에 대해 《지봉유설》의 저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수광은 이미 당대에 문장가로도 인정받았던 인물이었다. 《지봉유설》만 해도 약 40퍼센트 정도의 분량이 시와 문에 관한 내용일 정도로 이수광은 문장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이수광이 그토록 뛰어난 문재였다고는 해도 그의 시가 안남국에서 유생들에게 암송될 정도라는 건 매우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조완벽은 같은 조선인인 이수광의 문명文名을 예상치도 못했던 안남국에서 듣게 된 것이다. --- p.288
조선을 뒤흔든 천주학의 충격 도미니코회와 프란체스코회 선교사들이 예수회 선교사들의 적응주의 선교 방식이 옳은지를 1643년 로마 교황에게 질의하면서 전례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99년 후 예수회가 논쟁에서 패배하면서 조상의 제사도 금지되고 천주를 상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만약 예수회의 선교 방식이 인정되었다면 윤지충이 죽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천주교 신자였던 양반들의 이탈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p.303
허리띠를 매지 않아 부끄럽습니다 ‘창피하다’라는 단어는 원래 ‘옷을 입고 허리띠를 매지 않다’라는 뜻이다. 이수광은 옷을 입고 띠를 매지 않는 것과 마음이 부끄러운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지금 사전을 찾아봐도 그 연관성을 알 수가 없다. ‘창피’라는 단어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원뜻 그대로 쓰이고 한국에서만 ‘부끄럽다’는 뜻으로 쓰인다. 아마도 ‘창피’라는 단어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개념의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라 짐작된다. --- p.327
황제가 복날에 개고기를 하사하였다 그런데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인 복날에 마찬가지로 양기가 가장 센 동물인 개고기를 먹는 것은 얼핏 생각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여름에 더위가 기승을 부릴수록 겉은 뜨거운 반면에 몸 안은 차게 된다. 즉 겉은 양의 기운을 띠지만 속으로는 음의 기운을 띠는 것이다. 여름에 찬 것을 먹으면 배탈이 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사람의 몸 안에 가득 찬 음기를 다스리려 양기의 동물인 개고기를 먹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의 70퍼센트가 태음인, 소음인의 체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욱 양기를 보해줄 음식이 필요하다. --- p.354
숟가락은 조선에서만 사용한다 어찌나 많이 먹었는지 유구국, 즉 지금의 오키나와 사람들이 밥을 많이 먹는다고 놀릴 정도였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이 먹었을까? 조선 후기의 문헌에 따르면 성인 늳자는 한 끼에 7홉, 성인 여자는 5홉, 아이들은 3홉을 먹었다고 한다. 당시의 1홉은 대략 지금의 60씨씨 정도이므로 7홉은 420씨씨에 가까운 분량이다. 현재 전기밥솥에 달려 나오는 컵의 용량이 160씨씨인 것을 감안하면 거의 세 배나 많다. 그러니까 요즘 성인 남자 서너 사람이 먹을 분량을 혼자서 한 끼에 먹은 셈이다. --- p.368
오줌을 마시면 건강해진다 오줌을 마시는 것이 건강에 매우 좋다고 여겨 윤회주라고 이름 붙였다. 여기서 윤회의 의미는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는 뜻보다는 ‘다시 태어날 정도로 젊어진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이 글에 등장하는 정협과 곽지선은 이수광과 같은 시대를 살다가 간 조선시대 문인들이다. 양반들이 오줌을 먹을 정도로 요료법은 조선시대에 널리 행해진 치료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