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바닷가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다. 1993년 《시문학》에 「내가 사랑한 겨울나무」외 9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그리운 막차』, 『손끝으로 달을 만지다』외 러시아어 시집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Транссибирские Ночи)』이 있다.
날밤을 새우고 있는 게지 사랑을 잃고 밤새 깡술을 마시거나 하늘에 잉크를 뿌려놓은 듯 만년필을 꺼내 편지라도 써야 하는가 은세계 공원으로 가는 다리 위에는 수줍게 반달이 걸려 있는데 레닌 동상 너머 태양은 유정처럼 불타고 있다 해가 지지 않았는데 달은 떠오르고 북국에서는 밤도 사무쳐온다 달무리에 젖어 드는 저녁놀 겨울을 생각하면 잠들지 못하겠더라 밤 기차는 갈비뼈를 흔들며 지나고 하늘에 매달려 천장화를 그리고 있는 듯 지평선 위 구름에 번지는 파스텔화 천지창조 같은, 눈이 멀도록 그대를 생각한다는 것 ---「백야」중에서
누가 사랑을 물어온다면 시베리아로 가 반란처럼 피어난 엉겅퀴 한 송이 보여주리
벌판에 열 달 내내 눈 쌓이고 자작나무 숲에 안개가 덮여도 원색의 야생화는 피어난다
유형의 길을 가던 님 따르다 눈밭에 나뒹굴던 여인처럼 길가에 맨발로 피어난 들꽃
여름은 짧고 길은 어두워도 그대에게 가야만 하는 길 사랑은 들꽃처럼 붉어지고
누가 사랑을 물어온다면 그냥 시베리아로 달려가 엉겅퀴 한 송이 물들여주리 ---「시베리아의 들꽃」중에서
사상을 팔던 혁명기가 있었지 협동농장에서 노동을 팔던 소련도 저물고 몸을 파는 자본의 시대가 왔지
한 끼의 마른 흑빵을 사기 위해 영혼마저 팔고 돌아서던 길 발 아래 밟히던 첫눈은 어떠했을까
낙엽의 거리에 눈이 내리면 발자국 무성했던 대지도 시리지 않겠다
간밤 당신이 그리 오시려고 자다 깨다 반복했었는지 창밖 내미는 손길 위에 첫눈 ---「첫눈은 혁명처럼」중에서
갈 데까지 간 사랑은 아름답다 잔해가 없다 그곳이 하늘 끝이라도 사막의 한가운데라도 끝끝내 돌아와 가장 낮은 곳에서 점자처럼 빛난다 눈이 따스한 것은 모든 것을 다 태웠기 때문 눈이 빛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기 때문 촛불을 켜고 눈의 점자를 읽는 밤 눈이 내리는 날에는 연애도 전쟁도 멈춰야 한다 상점도 공장도 문을 닫고 신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 성체를 받듯 두 눈을 감고 혀를 내밀어보면 뼈 속까지 드러나는 과거 갈 데까지 간 사랑은 흔적이 없다 ---「눈의 묵시록」중에서
겨울도 아닌 것이 봄도 아닌 것이 그대를 사랑하여 아프다 가는 눈발의 춤사위 따라가다 보면 솜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발끝 올듯 말듯 올듯 말듯 눈발에 길이 막혀버렸는가 기다리지만 그대는 쉬 오지 않는다 얼어붙은 우물가 꽉 막힌 펌프에 떨리는 두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속울음이 솟구칠 것 같은 그대를 사랑하여 겨우내 눈 내리고 눈에 갇혀 오시지 못하는가 인간도 아닌 것이 짐승도 아닌 것이 그대를 사랑하여 ---「꽃샘추위」중에서
울컥
겨울나무가 얼어 죽지 않으려면 울컥하는 것이 있어야겠다 마룻바닥에 울리는 통성기도나 남몰래 흘리는 눈물 같은 것들이 뿌리에서 가지 끝까지 밀고 올라야겠다 눈과 눈이 고사리손을 마주잡고 빈 들을 건너가는 겨울밤을 나려면 울컥하는 것들이 있어야겠다 다시 볼 수 없는 북방의 여인이나 갈 수 없는 설움들이 목울대까지 차올라 얼굴에는 신열이 올라야겠다 빈 겨울들에는 바람이 들이치고 쓰러지는 겨울나무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