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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 / 속시화 - 지식을만드는지식 수필비평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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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 / 속시화 - 지식을만드는지식 수필비평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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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7년 05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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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13 9791128823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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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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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구양수
『시화(詩話)』의 지은이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북송(北宋) 때의 문학가 겸 역사가로 자가 영숙(永叔)이고 호가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이며 시호가 문충(文忠)이다. 문학가로서의 구양수는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하는 뛰어난 문장가요 송시(宋詩)의 특질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일 뿐만 아니라 송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사인(詞人)이기도 했으며, 역사가로서의 구양수는 『신당서(新唐書)』와 『신오대사(新五代史)』의 저자였다.
그는 진종(眞宗) 경덕(景德) 4년(1007) 면주[綿州,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몐양(綿陽)]에서 당시 면주군사추관(綿州軍事推官)으로 재임 중이던 구양관(歐陽觀, 952∼1010)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수주[隨州,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쑤이저우]에 있는 숙부 집에 의탁했다. 다행히 양가집 딸인 어머니가 상당한 수준의 학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구양수는 어머니에게 글자를 배울 수 있었는데 종이와 붓이 없어 갈대를 붓으로 삼고 모래를 종이로 삼아 글자를 익혔다.
스물네 살 되던 해인 인종(仁宗) 천성(天聖) 8년(1030)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해 서경유수추관(西京留守推官)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당시 서경유수는 전유연(錢惟演)이었는데 그의 막부에 윤수(尹洙)·매요신(梅堯臣) 등의 뛰어난 문인들이 있어 그들과 가까이 지낸 덕분에 그들의 영향으로 시문 혁신(詩文革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경우(景祐) 3년(1036)에 재상 여이간(呂夷簡)의 횡포를 옹호하는 고약눌을 비판하다가 이릉[夷陵,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이창(宜昌)]현령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경력(慶曆) 5년(1045)에 저주[?州,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추저우]지주(知州)로 나갔는데 저주지주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취옹이라는 자호를 짓고 <취옹정기(醉翁亭記)>라는 불후의 명문을 창작했다.
경력 8년(1048)에 양주[揚州,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양저우]지주(知州)로 부임해 재임 기간에 평산당(平山堂)이라는 유명한 건물을 지었고, 황우(皇祐) 원년(1049)에 영주[潁州, 지금의 안후이성 푸양(阜陽)]지주로 부임했는데 서호(西湖)를 비롯한 영주의 산수에 매료된 나머지 나중에 그곳을 퇴거지로 삼는 계기가 되었다.
가우(嘉祐) 2년(1057)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예부시(禮部試)를 주관한 그는 태학체를 중시하던 당시의 문풍을 바로잡기 위해 태학체로 작성한 답안을 불합격시켰고 소식(蘇軾)을 발굴했다.
구양수는 그 뒤 예부시랑(禮部侍郞)·추밀부사(樞密副使)·호부시랑(戶部侍郞)·참지정사(參知政事)와 몇몇 고을의 지주를 더 역임하고 신종(神宗) 희녕(熙寧) 4년(1071) 6월에 마침내 사직을 허락받아 7월에 영주로 돌아가서 한가로이 지냈다. 그러나 그는 한가로운 생활을 오래 즐기지 못하고 1년 뒤인 희녕 5년(1072) 윤7월에 병사하고 말았다. 향년 66세였다. 문집으로 『구양문충집(歐陽文忠集)』이 있다.
저자 : 사마광
『속시화(續詩話)』의 지은이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북송 때의 유명한 역사가로 자가 군실(君實)이고 호가 우수(迂?)다. 섬주(陝州) 하현[夏縣,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샤현] 속수향(涑水鄕) 출신이기 때문에 속수선생이라고도 하고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온공(溫公)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북송 진종(眞宗) 천희(天禧) 3년(1019)에 사마지(司馬池, 980∼1041)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상황 판단이 빠를 뿐만 아니라 결단성도 있었다.
인종(仁宗) 보원(寶元) 원년(1038)에 스무 살의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아간 그는 인종 황우(皇祐) 3년(1051)에 관각교감(館閣校勘)을 맡았는데 이것은 경전과 역사를 좋아한 그에게 조정의 각종 전적을 자유로이 열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황우 5년(1053)에 사관검토(史館檢討)라는 사관(史官)의 직책을 맡음으로써 더욱더 역사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종(神宗) 때에 이르러 왕안석(王安石)이 신법(新法)을 강행하자 그는 이에 반대하다가 마침내 낙양(洛陽)으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294권이나 되는 거질의 역사책 『자치통감』을 저술했다.
원풍(元豊) 8년(1085)에 신종이 세상을 떠나고 열 살짜리 아들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섭정이 된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신법을 싫어한 나머지 구법파의 영수인 사마광을 불러들여 재상으로 삼았다. 그러자 사마광은 신법파 인사들을 모조리 조정에서 몰아내고 그들이 제정한 신법을 하나씩 하나씩 모두 폐기해 버렸다. 그러나 조정으로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원우(元祐) 원년(1086) 10월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저서로 『자치통감』 이외에 『온국문정사마공문집(?國文正司馬公文集)』·『계고록(稽古錄)』·『속수기문(涑水記聞)』·『절운지장도(切韻指掌圖)』 등이 있다.
≪시화(詩話)≫의 지은이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북송(北宋) 때의 문학가 겸 역사가로 자가 영숙(永叔)이고 호가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이며 시호가 문충(文忠)이다. 문학가로서의 구양수는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하는 뛰어난 문장가요 송시(宋詩)의 특질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일 뿐만 아니라 송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사인(詞人)이기도 했으며, 역사가로서의 구양수는 ≪신당서(新唐書)≫와 ≪신오대사(新五代史)≫의 저자였다.
그는 진종(眞宗) 경덕(景德) 4년(1007) 면주[綿州,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몐양(綿陽)]에서 당시 면주군사추관(綿州軍事推官)으로 재임 중이던 구양관(歐陽觀, 952∼1010)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수주[隨州,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쑤이저우]에 있는 숙부 집에 의탁했다. 다행히 양가집 딸인 어머니가 상당한 수준의 학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구양수는 어머니에게 글자를 배울 수 있었는데 종이와 붓이 없어 갈대를 붓으로 삼고 모래를 종이로 삼아 글자를 익혔다.
스물네 살 되던 해인 인종(仁宗) 천성(天聖) 8년(1030)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해 서경유수추관(西京留守推官)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당시 서경유수는 전유연(錢惟演)이었는데 그의 막부에 윤수(尹洙)·매요신(梅堯臣) 등의 뛰어난 문인들이 있어 그들과 가까이 지낸 덕분에 그들의 영향으로 시문 혁신(詩文革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경우(景祐) 3년(1036)에 재상 여이간(呂夷簡)의 횡포를 옹호하는 고약눌을 비판하다가 이릉[夷陵,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이창(宜昌)]현령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경력(慶曆) 5년(1045)에 저주[?州,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추저우]지주(知州)로 나갔는데 저주지주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취옹이라는 자호를 짓고 <취옹정기(醉翁亭記)>라는 불후의 명문을 창작했다.
경력 8년(1048)에 양주[揚州,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양저우]지주(知州)로 부임해 재임 기간에 평산당(平山堂)이라는 유명한 건물을 지었고, 황우(皇祐) 원년(1049)에 영주[潁州, 지금의 안후이성 푸양(阜陽)]지주로 부임했는데 서호(西湖)를 비롯한 영주의 산수에 매료된 나머지 나중에 그곳을 퇴거지로 삼는 계기가 되었다.
가우(嘉祐) 2년(1057)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예부시(禮部試)를 주관한 그는 태학체를 중시하던 당시의 문풍을 바로잡기 위해 태학체로 작성한 답안을 불합격시켰고 소식(蘇軾)을 발굴했다.
구양수는 그 뒤 예부시랑(禮部侍郞)·추밀부사(樞密副使)·호부시랑(戶部侍郞)·참지정사(參知政事)와 몇몇 고을의 지주를 더 역임하고 신종(神宗) 희녕(熙寧) 4년(1071) 6월에 마침내 사직을 허락받아 7월에 영주로 돌아가서 한가로이 지냈다. 그러나 그는 한가로운 생활을 오래 즐기지 못하고 1년 뒤인 희녕 5년(1072) 윤7월에 병사하고 말았다. 향년 66세였다. 문집으로 ≪구양문충집(歐陽文忠集)≫이 있다.
≪속시화(續詩話)≫의 지은이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북송 때의 유명한 역사가로 자가 군실(君實)이고 호가 우수(迂?)다. 섬주(陝州) 하현[夏縣,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샤현] 속수향(涑水鄕) 출신이기 때문에 속수선생이라고도 하고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온공(溫公)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북송 진종(眞宗) 천희(天禧) 3년(1019)에 사마지(司馬池, 980∼1041)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상황 판단이 빠를 뿐만 아니라 결단성도 있었다.
인종(仁宗) 보원(寶元) 원년(1038)에 스무 살의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아간 그는 인종 황우(皇祐) 3년(1051)에 관각교감(館閣校勘)을 맡았는데 이것은 경전과 역사를 좋아한 그에게 조정의 각종 전적을 자유로이 열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황우 5년(1053)에 사관검토(史館檢討)라는 사관(史官)의 직책을 맡음으로써 더욱더 역사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종(神宗) 때에 이르러 왕안석(王安石)이 신법(新法)을 강행하자 그는 이에 반대하다가 마침내 낙양(洛陽)으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294권이나 되는 거질의 역사책 ≪자치통감≫을 저술했다.
원풍(元豊) 8년(1085)에 신종이 세상을 떠나고 열 살짜리 아들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섭정이 된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신법을 싫어한 나머지 구법파의 영수인 사마광을 불러들여 재상으로 삼았다. 그러자 사마광은 신법파 인사들을 모조리 조정에서 몰아내고 그들이 제정한 신법을 하나씩 하나씩 모두 폐기해 버렸다. 그러나 조정으로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원우(元祐) 원년(1086) 10월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저서로 ≪자치통감≫ 이외에 ≪온국문정사마공문집(?國文正司馬公文集)≫·≪계고록(稽古錄)≫·≪속수기문(涑水記聞)≫·≪절운지장도(切韻指掌圖)≫ 등이 있다.

옮긴이 류소진(柳素眞)은 이화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북송시화연구(北宋詩話硏究)>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베이징대학에서 <소식의 고려 및 조선 한문 시단에 대한 영향(蘇軾對高麗及朝鮮漢文詩壇的影響硏究)>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한국교원대학교·한양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연구 논문으로 <고려 시기의 ‘동파열’과 이규보 시가(高麗時期的‘東坡熱’與李奎報詩歌)>·<한국 고대 문인의 화소시(韓國古代文人的和蘇詩)>·<소식의 해동강서시파에 대한 영향(蘇軾對海東江西詩派的影響)>·<조선 중기 문인 신흠(申欽)의 소식관(蘇軾觀)>·<조선 중기 성리학자 신흠(申欽)의 화소시(和蘇詩)>·<육일시화(六一詩話)의 시가 인용 양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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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요신(梅堯臣)의 시 「복어(河豚魚)」

매성유(梅聖?)가 한번은 범희문(范希文)이 마련한 자리에서 「복어(河豚魚)」라는 시를 지어 “봄철의 모래톱에 갈대 싹 나고, 봄을 맞은 강 언덕에 버들개지가 나네. 복어는 이때가 되면, 귀해져서 물고기나 새우는 치지도 않네”라고 했다. 복어는 언제나 늦은 봄에 나와 물 위에서 떼를 지어 헤엄치다가 버들개지를 먹고 살찐다. 남방 사람들은 대개 갈대 싹과 함께 국을 끓이고는 맛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러므로 시를 아는 사람들은 첫머리 두 구절만으로 이미 복어의 장점을 다 말했다고들 한다. 매성유는 평생 시 읊기에 고심했는데 한적하고 심원한 것과 예스럽고 담박한 것을 시정(詩情)으로 삼았기 때문에 시를 구상하는 것이 지극히 힘들었다. 이 시는 술자리에서 지어졌지만 필력이 웅건하고 넉넉하며,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지만 결국 절창이 되었다.

梅聖?嘗於范希文席上賦「河豚魚」詩云 : “春洲生荻芽, 春岸飛楊花. 河豚當是時, 貴不數魚鰕.” 河豚常出於春暮, ?遊水上, 食絮而肥. 南人多與荻芽爲羹, 云最美. 故知詩者謂?破題兩句, 已道盡河豚好處. 聖?平生苦於吟詠, 以閑遠古淡爲意, 故其構思極艱. 此詩作於??之間, 筆力雄贍, 頃刻而成, 遂爲絶唱.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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