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보는 시험은 그래도 양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어떻게 푸는지 미리 배우고 문제를 던져 주지 않나. 하지만 엄마도 아빠도 내게 그 지겨운 문제들을 던져 줄 때 그러지 않았다. 그냥 상냥한 얼굴로 웃으며 잘 자라고 하고 죽었고, 덤덤한 얼굴로 잘 지내라고 하고 그 여자의 집으로 가지 않았던가.
--- p.19-20
지구인도 나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다.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더 큰 위험을 초래할 것이다. 최대한 부드럽고 고분고분하게 대답해 주는 게 최선일 것이다.
“파, 파, 파, 팔십일……. 그, 그, 그럼 너, 너…….”
“내 이름은 피피. 네 이름은 띨빵.”
“피피? 그런데 어, 어, 어떻게 내, 내 이름을……. 아, 아니 그, 그건 내 이름이 아니라…….”
--- p.57
‘날 못 잡아먹어 안달 난 괴물 같은 인간, 학생이 힘없다고 학부모 앞에서 목에 힘주고, 앞뒤 콱콱 막힌 융통성 없는 선생, 난 이 학교를 결단코 떠나고 말 거야.’
나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벅벅 긁으며 비명 같은 울음을 터트렸다.
‘아, 똥 같은 학교. 진짜 똥 같은 선생.’
--- p.102
“내가 왜 좋아?”
윤아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윤아 눈 속으로 쏙 빨려들 것만 같다.
“어? 어, 그냥 다 좋아.”
“얼렁뚱땅 말고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어디가, 어떻게, 왜?”
윤아가 따지고 든다. 머리가 빨리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 생각이 안 난다. 답답해서 미치겠다. 끄윽, 트림까지 나온다. 윤아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획 돌린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게, 너무 예쁘고 귀엽고, 무조건.”
--- p.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