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서해의 본명은 학송(鶴松)이고, 서해(曙海)·설봉(雪峰)·풍년년(豊年年)으로도 불렸다. 1901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성진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할 수밖에 없었고, 간도로 이주하지만 결국은 하층민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가난했다. 그러다 1918년 3월 〈학지광〉에 시를 발표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하지만, 그의 본류는 역시 소설이다. 1924년 1월 28일부터 2월 4일까지 〈동아일보〉에 〈토혈(吐血)〉을 연재하게 된다. 같은 해 10월 단편 〈고국〉이 〈조선문단〉의 추천을 받게 되고, 이듬해는 아예 〈조선문단〉에 입사한다. 그러면서 그의 간도 생활을 그린 〈십삼원 拾參圓〉·〈탈출기〉·〈살려는 사람들〉 등을 발표한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활동했으며, 31세라는 나이로 그의 투쟁은 끝난다. 가난하게 살다 간도로 희망을 찾아 떠난 홍염의 문 서방이 최서해이다. 혁명을 꿈꾸며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어린 최서해 때부터의 소망이었을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울컥 솟는 분노는 최서해를 극한까지 몰아서 많은 작품을 남기게 했고, 그 작품 하나하나에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넣었다. 끊임없이 작품으로 세상을 뒤집으려고 했던 최서해. 그는 강경애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
적다고 믿었던 자기의 힘이 철통 같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자기의 요구를 채울 때 사람은 무한한 기쁨과 충동을 받는다. -- 홍염 중에서
오늘의 상황에서 최서해의 판단이 옳다고 볼 수 없지만, 그가 지녔던 세계에 대한 요구, 그 요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 그것이 그의 작품이 존재하는 고귀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