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좋은 사람이야.” “알아요. 다들 그렇게 말해요. 근데 날 좋아한다고 했던 사람들은 이상하게 내가 그냥 그뿐인가 봐요.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날 버리고 가더라고요. 난 상처도 받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가 봐요. 그리고 돌아온다고 쉽게 말을 하죠. 내가 그렇게 쉬운가요?” “왠지 내가 당신을…….” 서준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민유는 꼴깍 숨이 넘어갔다. 다음 말이 너무나 기다려졌다. 무슨 말인지 예측하는 그런 김칫국을 마시는 일이 또 일어났다. 마음속으로 자꾸만 기대감이 솟구쳤다. 서준의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난 누굴 좋아하기에 자신이 없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날 떠나가거든.” 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민유가 서준의 맥주 캔을 들이켰다. “굉장히 겁쟁이네요. 난 당신 좋아하는데.” 민유가 뱉어낸 말에 서준이 뒤돌아섰다. 갑작스러운 말. 자신의 가슴 어딘가에서 뱅뱅 돌던 말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에 망설였던 말. 너무 오랜만에 찾아온 감정이라 이렇게 짧은 시간에 생길 수 없다고 생각한 그런 감정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우리 이제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쉽잖아. 당신이야말로 너무 쉬운 거 아니야?” “쉽기는 뭐가 쉬워요. 이렇게 말하는 게 얼마나 가슴이 떨리는 일인데. 단순해지면 안 되는 건가요? 나 신경 쓰인다면서요. 난 그게 나 좋아한다는 말로 들렸는데 아니에요?” “그냥 신경이 쓰인다는 거야, 그냥…….” “그래요. 나도 그냥 좋다는 거예요, 그냥. 거참, 사람 민망하게.” 민유가 양 볼을 잡아 얼굴을 돌리며 침대 쪽에 몸을 앉혔다. 이렇게 고백을 하다니. 이렇게 밀폐된 방 안에서 남자는 아니라고 부인하는데 자신은 좋다고 밀어붙이며 고백을 하다니. 자신이 참 못났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러니 매번 뒤통수를 맞는 거겠지 싶다. 누굴 쉽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마음을 쉽게 움직이는 것은 맞는 것 같다. 너무 일찍 해석해 버리고, 너무 일찍 그것이 관심이라 생각해 버리니 그만큼 상처도 받는 거겠지 싶다. 자신의 연애는 늘 그랬다.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한 적도 있고 고백을 받은 적도 있지만 늘 상처를 받고 차이는 쪽은 자신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줘서 그런 것인가. 너무 많은 것을 줘버려서 그런 것인가. 또 이렇게 말해놓고 후회하는 중이었다. “나도…… 당신이 좋아, 그냥.” 서준이 말을 조그맣게 떼니 민유의 얼굴이 금방 붉어졌다. “네에?” “그냥 그렇다고.” 서준이 말을 얼버무리니 민유는 빙그레 웃음이 흘러나왔다. 머릿속에 반짝 무언가 스쳤다. 서준과 자신. 그렇게 둘이 인연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 2년 전 오늘 그 응급실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말을 들으면 어떨까? 표정이…….’ “내가 왜 좋아요? 뭔가 인연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그게…….” “내가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지 못해서 좋아. 날 불쌍하게 쳐다보지 않아서.” 서준의 말에 민유는 입을 닫았다. 들떴던 가슴도 진정시켰다. 말해선 안 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