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성은 바랑을 메고 전국을 누비며 다녔다. 온 산하가 그의 집이고 수행처였다. 그 무렵 춘성은 망월사에를 들러 수행하였다. 춘성과 망월사와의 인연은 깊디깊은 바닷물 같은 것이었다. 춘성은 망월사에서 지독한 수행을 거듭하였다. 망월사 뒤에 있는 바위에서 그는 추운 겨울날에 삼매에 들 정도로 참선에 몰입하였다. 그는 그 후유증으로 손과 발이 동상이 걸렸다. 그로 인해서 춘성의 말년에는 손톱과 발톱이 썩기도 했다. 춘성이 17일간을 단식을 하면서 죽기 일보 직전에 관음보살을 만났다는 정황도 춘성의 그 시절 수행력을 짐작 할만하다. --- p.82
춘성은 그의 출가 은사인 한용운에게 자주적인 독립의식을 배웠다면, 만공에게는 선의 정법을 전수받았다. 그래서 춘성은 만공의 입적 후에는 만공의 수법(受法) 제자로도 공인되었다. 1982년 만공문도회에서 펴낸 『만공 법어』의 말미에는 만공의 수법제자의 법명이 나온다. 그 37명의 명단에 춘성의 이름이 당당하게 기재되어 있다. 다만 춘성은 은상좌(恩上座)가 아니고, 참회제자라는 표현을 하였다. 은상좌, 참회제자를 구분한 주체는 만공문도회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경허, 만공으로 이어진 참다운 선법을 누가 올곧게 계승, 실천하였느냐이다. --- p.89
춘성이 망월사 불사를 할 때에 나무를 베었다고 해서 경찰서에 가서 나눈 대화였다.
“본적이 어디입니까?”
“내 본적은 우리 아버지 신두(腎頭)이지.”
경찰은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추궁하듯이 재차 물었다.
“본적을 말해요, 본적이 어디냐고요?”
“그것은 당신이나 나도 가지고 있으며, 살았다 죽었다 하는 자지야.”
자지라고요?
경찰은 기가 차듯이 웃고 말았다. 너무나도 태연하게 남성의 상징을 자신의 본적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웃을 도리 밖에 없었다. 경찰은 애써 긴장하면서 다음 질문을 하였다.
“그러면 고향은 어디입니까?”
“내 고향이야, 우리 어머니 보지 속이지.” --- p.112
그 무렵의 각처에 있는 수좌들은 춘성의 회상에서 한 철이라도 나려고 발길을 재촉하였다. 망월사 선방에서는 이불을 덮지 않고 수행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리고 춘성도 대중들과 함께 큰방에서 함께 자고 수행을 하였다. 망월사 수좌들은 방석 서너 개만 있으면 잠자리는 해결되었다.
그래도 춘성 몰래 담요를 갖고 와서는 덮고 자는 몸이 불편한 수좌가 있었다. 그러면 춘성은 즉각 “야! 시부랄 놈아 그 담요 당장 내놓지 못해”하고서는 담요를 빼앗아 바로 불태워 버렸다. 어떤 신도는 망월사에 이불이 없는 것을 보고 이불 수십 채를 가져 와 보시하였다. 그러자 춘성이 신도가 기증한 이불 전체를 마당에 모아 놓고 바로 불을 질러 버렸다는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비사이다. 겨울철에는 수좌들이나 신도들이 간혹 털 잠바를 입고 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 털옷을 안방에 걸어 놓고 법당에 갔다 오면 불에 타버리기 일쑤였다. 옷의 임자인 수좌가 항의를 하면, 춘성은 “보기 싫어서 내가 태워 버렸다”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수행하는 수좌가 공부를 마치기도 전에 편한 잠자리, 따듯한 옷을 어찌 바랄 수 있겠느냐는 추상같은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다. --- p.117~118
어느 날 춘성은 통금 시간이 넘어서 밤길을 가고 있었다. 방범 순찰을 하던 순경이 춘성에게 물었다.
“누구요?”
춘성이 어둠 속에서 즉각 답을 하였다.
“중대장이다!”
그 소리를 들은 순경은 목소리는 노인 목소리인데, 중대장이라고 하니 의아해서 들고 있던 후래쉬로 춘성을 비추었다.
“아니? 스님 아니시오!”
“그래, 내가 중의 대장이지! 맞지?” --- p.397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청와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육영수는 보문사에서 겪은 춘성이 생각이 났는지, 아니면 누가 큰스님인가를 주변에 물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춘성을 청와대에서 열린 자신의 생일잔치에 초청하였다. 그 초청은 자신의 생일에 와서 좋은 법문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춘성이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그 당시 힘 꽤나 쓰는 고관대작, 그리고 고관대작의 부인네들, 얼굴이 번지르한 국회의원 등이 법석을 떨고 있었다. 이런 저런 식순이 지나서 춘성이 설법을 할 차례가 되었다. 법상에 오른 춘성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0여분이 지나자, 사람들의 몸이 비틀어지고 짜증이 나기 시작할 즈음에 춘성은 주장자로 법상을 쿵! 한번 치며 말했다.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에미 뱃속에 들었다가, ‘응아’ 하고 보지에서 나온 날이다.”
--- p.398~399
춘성은 진관사 대웅전 상량식을 한다는 말을 들었던 터에, 진관 비구니가 법사로 초청하자 아침나절 일찍이 진관사로 왔다. 서울 변두리의 한적한 절이었지만, 절을 재건하려는 진관을 따르는 신도들이 제법 모여 들? 사람이 매우 많았다. 드디어 초청법사가 법문을 할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이날 춘성은 여느 때처럼 양복을 걸쳐 입었다. 메꼬 모자를 쓰고, 구두까지 신은 상태이었다. 그러니깐 도저히 그 차림으로는 불교행사장의 법상에 오를 수는 없었다. 춘성은 그 절에 있는 비구니의 장삼 저고리를 빌려 입게 되었다. 진관사에서 제일키가 큰 비구니의 장삼을 걸쳐 입었지만, 신체가 장대하였던 춘성에게는 종아리에도 못 미쳤다.
이렇게 춘성은 아주 짧은 미니장삼을 입고서는 여러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 법상으로 올라갔다. 법상에 오른 춘성은 몇 분간은 묵언으로, 양구하며,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 말을 하였다.
“혼수에는 좆이 제일이요, 불사에는 돈이 제일이다!”
--- p.420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 기념식에서 기념연설을 하고 만세 삼창을 선도하였다. 그래서 그 길로 한용운은 일제에 피체되어 서대문 감옥에 갇혔다.
이렇게 한용운이 옥에 수감되자 춘성은 한용운의 옥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나왔다. 그는 거처를 서울의 외곽에 있는 절인 망월사로 정하고, 서대문 감옥을 드나들면서 한용운을 정성껏 시봉하였다. 춘성은 그때 망월사에 머무르면서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덮고 자지도 않고 냉골 방에서 참선하며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그때 망월사를 들렀던 어떤 스님이 땔감이 절에 가득한 데에도 불구하고 불을 때지 않은 냉방에서 자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춘성에게 그를 물었다.
“아니, 저렇게 땔나무가 많이 있는데 어째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지 않고, 냉방에서 잠을 자는 게요?”
“그야 그렇지만, 제 스승이 독립운동을 하다 왜놈들 한데 붙잡혀 지금 서대문 감옥의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신데, 그 제자인 제가 어찌 따듯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춘성은 이처럼 한용운이 감옥에서 나오기 전에는 줄곧 냉방에서 자며 수행을 하였다. --- p.40~41
우리는 민족운동사에 길이 남을 문장인 『조선독립의 서』를 옥 밖으로 나오게 한 장본인이 춘성임을 알게 해 준다. 옥중에 수감되어 매서운 지조를 지키던 한용운은 조선독립에 대한 명분, 당위성을 일체의 책을 참고하지 않고, 1919년 7월 10일에 집필하여 일제의 재판관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면서 한용운은 그 글을 휴지에 써서 똘똘 말고, 종이끈으로 만들어 옥 밖으로 내보내는 자신의 옷의 갈피에 숨겨 춘성에게 전달하였다. 그러자 춘성은 항일 불교청년운동을 철저히 수행하면서 한용운을 열렬히 따르던 범어사 청년 승려인 김상호에게 그 문건을 전달하였다. 김상호는 이를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는 불교계의 비밀루트를 이용하여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25호(1919. 11. 4)에 그 전문이 게재되었다. --- p.42~45
춘성에 대한 별칭이 화엄법사이었으며, 『화엄경』을 거꾸로 외웠다는 저간의 구전이 나온 것은 위와 같은 백용성과 함께 한 강의회에서 비롯된 것이다. 춘성은 백용성의 대각교당의 『화엄경』 법사로 나서면서 백용성이 주관하는 어린이법회의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이를 전하는 『불교』지 48호(1928.6)의 『대각일요학교 설립』의 내용을 보자.
경성부 봉익동 2번지 대각교회(大覺敎會) 내에는 거(去) 4월 15일부터 대각일요학교(大覺日曜學校)를 설립하고 현재 남녀 학생 80여인을 교수(敎授)하는데, 고문은 백용성, 이인표, 이만승, 고봉운, 최창운 교장은 이근우, 교사는 이춘성, 안수길 제씨(諸氏)이며, 5월 6일에 제1회 학예회까지 개최하여 하모니카(독주), 자수노래(독창), 동화(오색사심이), 유희(밝은 달 독창), 딴스, 뻬니쓰, 요술, 연극 등을 관중의 갈채리에 흥행하였다더라.
--- p.65~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