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 처음 자리 잡다
일본의 감시와 탄압이 너무 심해서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을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주로 나라 밖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민끝에 만주와 상하이가 낫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일단, 일본과 전쟁을 해서 이기고, 그 다음에 독립을 이루자는 사람들은 임시정부를 만주에 세우자고 했다. 반면 외교 활동을 통하여 독립을 이루자는 사람들은 상하이에 세우자고 했다. 상하이는 한국과도 가깝고, 그곳에 세계 여러 나라의 대사관들이 있어서 우리나라의 독립 문제를 다른 나라에 널리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하이는 국제적인 항구 도시로 외국인이 사는 지역이 따로 있었다. 중국 땅이지만 프랑스의 법을 따르는 ‘프랑스 조계지’가 있었는데,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미치지 않아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었다. 결국 여러 의견을 모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상하이 내 프랑스 조계지에 정부 청사를 마련했다. 상하이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832년부터 일본의 압박으로 인해 항저우, 난징, 광저우 등을 거쳐 나중에는 충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한 임시 정부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을 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했다.
대한 독립의 주역들
백범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경무국장으로 임명되어,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그날까지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운명을 함께 하기로 했다. 또한 이봉창, 윤봉길 등과 함께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무력을 이용해 일본에 대항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이 외에도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 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독립운동가 김가진의 며느리였던 정정화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전달할 독립운동 자금을 치마폭에 숨긴 채 압록강을 건너 상하이로 망명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닐 때마다 어려운 살림을 도왔고, 일본의 감시를 피해 여섯 차례에 걸쳐 몰래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을 모아 임시 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는 안중근에게 재판장에서 당당하게 왜 우리나라가 독립해야 하는가와 동양 평화의 중요성을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다. 안중근이 사형 당하고 난 후에는 러시아와 중국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를 했고, 1920년에는 상하이로 와서 김구의 가족들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군인으로 활동했던 박차정은 항일 비밀 결사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을 했다. 조선의용대에서는 부녀 복무단장을 맡아 조선의용대 여성 대원들을 이끌며 일본과 맞서 싸웠고, 남편인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도 활동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