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정신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물의 목록을 점검하고 물체를 새로 배열하는 의식意識이고 의식儀式이다. 유머란 드높은 이상理想과 한심한 지상地上이라는 괴리乖離를 단축시켜 주는, 우리가 항용 합성해 내는 마약 일반一般을 가리킨다. 대부분의 마약이 그렇듯이 도취陶醉와 진정鎭靜을 부른다. 내성內省과 비판批判을 거치지 않은 유머는 일상日常과 초극超克을 할퀴고 찢는다. 존재는 우산雨傘처럼 가볍다. --- p.29
발목을 적시는 이슬 밭을 지나서 좌우대칭과 나선의 침엽수림을 지나서 청미래덩굴의 찬샘을 지나서 만나지는 한 떨기의 난폭한 바람이었다. 그가 추리의 귓전에 대고 말했다. 네게선 원추리 냄새가 나. --- p.224
돌이든 나무든 단단한 것들을 오래 연마하면 빛을 발하게 된다. 그것을 순결한 금속에 물리고 손가락 굵기에 맞추어 둥글게 고리 지으면 반지가 된다. 작고 굳고 섬세하게 빛나는 물건, 우리는 그것으로 1년이나 50년의 비탄을 견뎌내기도 한다. 바그다드의 청년 알라딘은 몽상가였다. 그는 알리리아와 잔지바르와 그라나다에 가고 싶었다. 그에게는 젊음과 희망과 한 개의 램프가 있었다. 알라딘은 램프의 구리 손잡이를 조금 잘라내어 오래오래 갈고 두드려서 반지를 만들었다. 자신의 손가락에 끼우려고 반지를 만드는 사람은 없다. 바그다드 청년 알라딘의 램프 손잡이가 반지로 변신한 것은 그가 마음 복판에 누군가를 두었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음울함과 빌헬름 라이히의 들짐승 같은 선열함. 세상은 반지로 이루어져 있다. 숙희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보이지 않는 반지를 살그머니 뺐다. 그리고 그것을 채군의 손가락에 끼웠다.
분량이 길지 않았지만 어느 여름 윤택수가 마포도서관 아현분관 제2열람실 112번 자리에서 썼다는 그 소설을 나는 한꺼번에 읽어 치울 수가 없었다. 읽다가 멈추고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읽곤 했다. 이게 소설이라고? 아니 이것은 장르를 구분할 수 없는 글이었다. 장르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글이었다. 문장 사이에서 노루새끼 같은 눈동자가 튀어나오기도 했고 어깨에 피가 흐르는 소년 하나가 묵묵히 서 있기도 했으니 내게 이 글은 통째로 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