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저, 너를 볼 때마다 일초에 스물네 개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영화를 보는 듯했어. 네 영화는 처음 스물세 번은 밝게 빛나는 이미지였다가 마지막 스물네 번째에 너무나 슬픈 이미지로 바뀌어 버렸지. 그 마지막 이미지는 네가 평소 품고 있던 찬란한 빛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왠지 모를 슬픔을 담고 있었어. 난 네 잠재의식 속의 슬픔, 아주 잠깐일 뿐인 그 섬광의 틈새로 드러난 슬픔을 보았어. 그 슬픔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나 성격보다 더 절실하게 너란 사람에 대해 말해주는 듯했지. 난 너를 그토록 슬프게 만든 게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보았어. 몇 번씩이나 나는 네가 그 이야기를 해 주기를 바랐어. 하지만 넌 절대 이야기해주지 않았지.
난 그저, 조심하라는 말을, 가령 우울증 같은 몹쓸 병이 너를 덮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 난 진심으로 네 안에서 스물네 번째 이미지가 승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길 바라. --- p.14
마르탱은 가브리엘을 사랑했다.
새벽녘의 바닷가, 마르탱은 자신이 벗어준 외투 위에서 잠든 가브리엘의 배를 베고 누웠다. 캘리포니아의 장밋빛 하늘 아래, 젊은 연인들은 바닷바람에 감싸여 있었다.
잠이 든 그들의 몸은 하나로 단단히 꿰매진 두 개의 심장이었다. 모래 위에 놓아둔 작은 라디오에서는 끊임없이 발라드 곡이 흘러나왔다. --- p.21
마르탱은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밤 11시까지 가브리엘을 기다렸다. 이제는 실낱같은 기대마저도 모두 포기해야 할 시간이었다. 한동안 가슴이 공허해지더니 이내 수치심으로 바뀌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달려온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왜 그토록 열정적이었는지, 왜 그토록 순진한 바보였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마르탱은 가진 걸 모두 걸었지만 다 잃었다. 그는 뉴욕의 추운 거리를 헤맸다. 42번가, 술집, 항구를 끝도 없이 걸었다. 그해 겨울, 뉴욕은 아직 뉴욕다웠다. 10여 년 후 살균된 뉴욕이 아닌, 앤디 워홀과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도시 뉴욕, 악마에게 문을 열어주기로 마음먹은 이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아웃사이더들이 활보하는 뉴욕이었다. --- p.33
“천국의 열쇠라는 게 도대체 뭔가?”
루아조 국장이 물었다.
“온갖 수수께끼로 둘러싸인 전설의 다이아몬드죠.”
OCBC 국장실은 이른 아침의 희뿌연 빛에 잠겨있었다.
마르탱이 키보드를 누르자 오묘한 푸른색에 회색 점이 박힌 계란 모양의 다이아몬드 사진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육십오 캐럿에 길이는 삼 센티인 다이아몬드입니다. 저 다이아몬드가 지난 삼백 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건 저 오묘한 빛깔 때문이었습니다.”
루아조는 호기심을 숨기지 않으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한데 저 다이아몬드를 소유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더욱 유명해진 보석이죠.”
“다이아몬드의 출처는?”
마르탱은 슬라이드를 넘기며 설명을 계속해 나갔다.
“저 다이아몬드는 골콘다라는 인도의 전설적인 광산마을에서 채취했습니다. 장 밥티스트 샤르팡티에라는 밀수업자가 인도의 사원을 약탈할 당시 어떤 여신상에 박혀 있던 저 다이아몬드를 빼내었다고 합니다.” --- p.118
“뭘 기다리란 말입니까? 혈압도 높고 소변에서 알부민도 검출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환자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제가 보건대 급간 증세가 분명합니다.”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야 없지요.”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합니다.”
알리스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인의 상태가 안정되면 태아에게도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현재는 증세도 미약할뿐더러 더 악화될 거라 예측할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증세가 미약하다고 했습니까? 지금 농담하는 겁니까?”
“자중하세요. 선생은 환자의 보호자이지 의사가 아닙니다.”
“수많은 여자들이 급간증세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장담하지만 그런 사례라면 선생보다 내가 더 많이 보았을 겁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니까요.”
“여긴 아프리카가 아니라 미국입니다. 게다가 당신 부인은 현재 임신 이십오 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제왕절개를 하면 태아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아키볼드의 표정이 순간 하얗게 굳어졌다.
“아내만 구할 수 있다면 아이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 p.181
“그가 내 아버지 맞아?”
“그래, 가브리엘, 아키볼드는 당신 아버지가 분명해.”
“당신은 언제부터 그런 사실을 안 거야?”
“오늘 아침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에서.”
“그런데도 내 아버지를 총으로 쏴 죽이려 했단 말이야?”
“그게 내 직업이니까.”
“사람을 죽이는 게 당신 직업이라고?”
“난 경찰이야. 비록 전직 경찰이지만…….”
낡당신이 경찰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어떻게 알았어?”
“구글에서 찾아봤어. 당신을 인터뷰한 어느 프랑스 신문의 기사가 나와 있더군.”
마르탱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당신 아버지를 총으로 쏴 죽이려 했던 건 아니야. 단지 오토바이를 겨냥했을 뿐이야. 난 그를 체포해야 하니까.” --- p.223
“그렇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한테 첫눈에 반한다는 건 어쩐지 이해하기 힘들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내 눈에만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네 엄마의 특별한 매력이 보였다고나 할까? 난 네 엄마조차도 모르고 있는 면을 보았으니까. 세월이 흐르면 네 엄마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내 눈에 훤히 들여다보였단다.”
“그런 사랑은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가능한줄 알았어요.”
“몰라서 그렇지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사랑이란다.”
“엄마가 아빠를 받아들이기까지 왜 오 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을까요?”
아키볼드가 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사랑받는다는 건 때로 두려움을 동반하는 것이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인생에서 신은 간혹 나쁜 때를 골라 좋은 사람을 보내준단다.” --- p.258
“사랑?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나약한 게 사랑이란다. 비오는 날 지펴놓은 불길 같다고나 할까? 불은 비를 막아주며 힘들여 땔감을 집어넣고, 갖은 정성을 다해도 어느 순간 꺼져버리지. 사랑도 불 같단다. 어느 순간이 되면 꺼지게 되니까.”
“영원히 남는 사랑도 있어요.”
“영원한 건 사랑한 후에 남는 고통뿐이란다.”
“그다지 듣기 좋은 말은 아니군요.”
“진실이란 언제나 듣기에 불편한 법이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그러니까 너무 괘념치 말거라.” --- pp.260~261
탑승대기구역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중간 기착지로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땅이었다. 기도와 명상에는 더 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가장 내밀한 곳에 숨어있던 두려움을 다시 만나야 했다. 떠날 순간이 되면 사람들은 고백성사를 하고 싶어 했다. 파웰 신부는 넉넉한 믿음과 사랑으로 사람들의 고백성사를 들어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 양심의 가책 그리고 후회스러운 과오에 대해 고백하는 사람도 있었다. 뜻하지 않은 고백성사를 계기로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는 사람도 있었다.
“저는 이 탑승대기구역에서 위대한 영혼부터 비참한 영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혼들을 만나보았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정말로 한계를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파웰 신부가 말을 마치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마르탱은 신부의 말이 끝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그러니까 이 수수께끼 같은 공항은 사고나 자살기도로 코마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들르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직 궁금한 게 있었다.
“계속 ‘탑승대기구역’이라고 말씀하시는군요.”
“네, 그렇습니다.”
“어디로 떠나기 전에 대기한다는 뜻입니까?” --- p.302
“넬슨 만델라가 말했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그림자가 아니라 빛이라고. 이것 봐, 애송이. 자네가 두려워 한 건 자네의 약한 면이 아니라 강한 면이었어. 세상을 저주하며 주저앉아 있으니까 차라리 속편하지 않던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
“자, 내가 충고 한 마디 하지. 자네는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행복해지기 위한 모험을 해야 하네.”
마르탱이 아키볼드를 쳐다보았다. 이제 그의 얼굴에서 미움이나 증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걸 이해한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마르탱은 그와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고 하셨죠?”
“이제 그 이야기를 마무리하겠네.”
“나쁜 소식은 뭡니까?”
“나쁜 소식은 자네가 삶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일세.” --- p.315
저 멀리, 뿌연 안개에 휩싸인 금문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브리엘은 마르탱과 아키볼드가 마지막 다툼을 벌였던 바로 그 장소에 차를 댔다.
“자, 이제 당신 차례야!”
가브리엘이 마르탱을 보고 말했다.
6개월 전처럼, 마르탱은 차 문을 열고 나가 자전거 이용자 전용 도로 표시 선을 넘어갔다.
마르탱은 난간에 몸을 기대고 바다 속에 튼튼하게 박혀있는 교각을 내려다보았다. 거센 파도가 교각에 부딪히며 하얀 거품을 일으켰다. 그는 얼굴을 때리는 바람을 맞으며 아직도 살아있다는 기적을 실감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는 다이아몬드를 만지작거렸다.
--- p.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