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문화예술대학원에서 문화예술학과에서 문화정책을 전공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개최한 공모전에서 「육갑 짚는 여자」로 입선했고, 현재 역사와 여성, 독신, 성문화 등을 주제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혼자 잘 살면 결혼해도 잘 산다』, 『SQ를 높여야 연애에 성공한다』가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동학농민운동의 남북접 조직관계」,「조선후기 실학자의 향청 향약론 연구」 등이 있다.
원래 열녀烈女란 남편이 먼저 죽어 개가改嫁할 수 있는데도 일부종사하는 여인을 의미했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열녀라는 의미가 반드시 순절殉節(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킨다)해야 하는 것으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나라에서도 종사從死한 여인만을 열녀로 포상했다. 조선 후기에 나오는 열녀전들도 남편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여 종사를 여성의 귀감으로 삼고자 했다. 미망인未亡人이라는 표현부터 죽어야 할 사람이 아직 죽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며, 이 말은 홀아비에게는 쓰지 않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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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완숙이 비록 양반가의 서녀로 출생하여 다시 서족庶族인 홍지영의 후처로 시집을 갔다 해도 경제적으로 풍족하였고 시집 식구들과도 잘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왜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버리고 또 가진 재물을 아낌없이 쓰면서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천주교 신앙에 매달렸던 것일까? 그리고 많은 여성이 가족관계를 끊으면서까지 천주교 신앙을 신봉하였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신유박해 때 강완숙과 그의 교우들이 보여준 행위는 마치 고대 로마 시대의 순교자의 모습과 흡사한 것이었다. 무엇이 그 여성들로 하여금 생명을 던지면서까지 천주교 신앙을 지키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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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은 60세가 넘은 여자의 몸으로 여섯 달 동안 악형을 받았음에도 17일 동안 단식항쟁을 했다. 죽을 지경에 이르자 보석으로 석방되어 아들과 손자, 여러 동지 앞에서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고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1933년 8월 22일, 62세의 나이였다. 당시 하얼빈의 지역 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남자현을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하고 하얼빈 외국인 묘지에 안장했다. 그러나 최근에 보훈처의 해외 항일 유적지 조사답사팀에 의하면 현재 그 무덤은 유실되고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