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 나는 ○○○입니다.
예, 이름 석 자로 당신을 부를 수는 있겠죠. 하지만 이름만으로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어요.
좋아요. 나는 ○○학교에 다니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은 ○○, 우리 아빠는 ○○회사에 다니고, 엄마는…….
신상에 관해 말해주니 조금은 낫군요. 하지만 그걸로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장래 꿈은 무엇인지, 대학 졸업 후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당신의 마음속을 알 수 없겠죠.
아! 예, 내 취미는 ○○, 학교에서 좋아하는 과목과 싫어하는 과목은 ○○와 ○○, 가고 싶은 대학은 ○○대학교이고, 학과는 ○○, 졸업 후 희망 직업은 ○○…….
설마 그게 당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죠? 그건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겉모습뿐일 테니까요. 당신의 속 모습을 보고 싶어요.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민이 뭔지, 어떨 때 행복하고 불행한지.
하루, 일주일, 일 년 내내 학교, 학원, 도서관,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갇혀 있는 내게 무슨 생각할 틈이나 자유가 있겠어요. 행복한지 불행한지? 주관식이 아니라 사지선다형이나 ○, ×로 고르라면 고민 없이 그냥 찍겠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냥 빨리 대학이나 들어가든지, 아니면 전쟁이라도 나서 모든 학교가 문 닫고, 입시도 중단돼 이 감옥 같은 교실에서 해방이나 됐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자고 일어났더니 어느새 내가 어른이 돼 있는 개꿈 같은 생각. 뭐 이런 정도…….
어! 이게 진짜 당신 속 모습은 아니겠죠? 그렇다면 당신을 좋아할 수 없을 것 같고. 당신을 좋아할 수 없다면, 당신을 통해 나를 알 수는 더더욱 없을 테고. 혹시 누구를 사랑해본 적은 없나요
사랑이요? 아! 예, 있기는 한데…….
그래요. 그 이야기를 해주세요. 어서요. -(본문 14~16쪽)
화폐가 통제하는 가격의 시대에 가치를 우선시하는 대표적인 것이 문학입니다. 오늘날 문학도 시장에서 유통되기 위해 가격이 매겨지는 문화상품이기는 해요. 하지만 창작 과정에 묻어나는 작가 정신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은 여전히 가격으로 환산될 수 없는 가치가 우선시되는 대표적인 예술임에는 변함없습니다. 당장 써먹을 수 없다는 문학의 무용성 비판에는 자본주의의 효율성이라는 판단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지요. 써먹을 수 없어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비효율적인 문학, 가격이 매겨지지 않아 차이라는 교환가치를 발생시키지 않는 문학, 그러므로 차이라는 억압을 가하지 않는 문학, 억압하지 않으므로 거꾸로 억압에 대해 말하거나 감시할 수 있는 문학, 이것이 ‘쓸모없음으로서 쓸모 있음’이라는 비평가 김현이 역설한 문학효용론이었어요. -(본문 83~84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