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방안, 어둡고 황량한 거리
--- 박관형 halim@wh.myongji.ac.kr
엄마는 흰 눈이 내리는 겨울날에 창가에 앉아 뜨개질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아직 외국으로 가버리기 한참 전에는, 나와 내 남동생, 그리고 세 살 위의 언니가 난로를 피워놓은 따뜻한 마루에서 그림 조각 맞추기를 하거나 식모가 금방 데워놓은 우유를 마시면서 화려한 그림책을 보거나 하는 것이 어린 여자아이인 내 겨울의 일상이었다. 남동생은 아직도 강보에 싸여져 눈도 채 뜨지 못하고 있었지만 엄마는 데운 우유를 손목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보고는 귀여운 왕자님, 하면서 남동생을 팔에 안는다. 세 살 위의 언니와 내가 먹을 우유와 비스킷은 식모가 챙겨주었다. 엄마는 내 남동생을 직접 안아서 키우기를 좋아했다고 들었다. 화려한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텔레비전의 만화 영화에서부터 시작된다.> - 배수아 단편소설 「프린세스 안나」, 창작집 『바람인형』에 수록.
남편의 자유분방함에 머리를 흔들며 떠나간 생모, 화가의 길을 찾아 뉴욕으로 간 아버지, 스물 셋의 나이에 네 명의 아이를 기르게 된 이모. 그리고, 남겨진 딸들. 배수아의 「프린세스 안나」는 딸들의 이야기다.
만화에서 보이는 변병준의 거의 집착에 가까운 철필로 그려진 원작 소설 「프린세스 안나」는 그래서, 과거에 대한 포근한 회고이다. 과거를 회고하는 것은 적어도 현재를 사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다. 비록 고생스럽고 때로는 추악하기까지 한 과거일지라도, 아무리 울고 싶어도 '지금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안나는 친절한 제과점, 금방 끓인 초콜릿과 갓 튀겨낸 도넛과 따스한 우유를 기억해낸다. 거기에는 딸들을 번갈아 업어주던 식모아이도 있었다. 그리하여 소설가 배수아는 넓지 않은 집안에 복작대던 어린 (혹은 다 자란) 딸들을 재현한다.
회고적인 시선과 그에 따라붙는 너그러움은 암울한 '지금'을 바라보는 다 자란 안나에게도 여전하다. 불투명 처리된 슬라이드 글라스의 손잡이처럼, 부르주아 만화 마니아만이 향유할 수 있다는 정전기 방지 처리가 된 뽀얀 포장비닐 너머로 실제보다 멋있게 보이는 만화책 표지들처럼. Blur 필터 두 번쯤 처리하고... 그렇게 되돌아 볼 수 있는 것이 성장이라면,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모의 잔소리를 저리도 어른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성장이라면, 그것으로 『프린세스 안나』를 성장소설이라고 부르는 데 큰 이의가 없으리라.
만화가는 원고지 100매 정도 분량의 단편 소설을 230쪽 분량의 만화로 옮기면서 Blur 필터를 undo했다. 그리고 Sharpen 필터를 두 번쯤 적용했을까? 아마도 despeckle 필터의 사용은 염두에 두지 않았을 듯하다.
변병준의 그림은 더없이 암울하다. 사포질을 한 듯 세밀하면서도 까칠까칠한 묘사와 화면의 한 구석도 남기지 않고 숨가쁘게 새카맣게 채워나간 철필 자국이 그렇고, 독자를 불순하게 올려보는 듯한 시선이 그러하거니와, 변병준의 안나가 바라보는 세계는 어린 시절의 갓 구운 과자부스러기 정도는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는 각박한 현재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소설과 만화는 동일한 줄거리와 이미지를 그리고 있지만, 변병준은 이를 거의 완전하게 재배열하고 새로운 분위기를 구축한다. 따스한 집안에 대한 묘사와 그곳에 사는 딸들의 이야기는 차갑고 황량한 거리와 노아와 핑크의 이야기로 대체된다. (불량스런 만화독자만이 납득할 수 있을 듯하다.) 집에서 겉돌며 화자의 위치에 머물던 안나는 이제 아예 길거리의 아이가 되었다.
웬만한 프로작가들도 고개를 저을 집착적인 작화, 특히 형부의 사고사를 묘사한 부분에서 전개한, 거의 의식의 흐름에 가까운, 강렬한 이중연출,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는 이미지 중 하나가 될 안나의 삼백안. 아직 한해의 2/3가 채 지나지 않았지만, 변병준의 『프린세스 안나』는 올 들어 한국만화가 획득한 가장 뚜렷한 성과물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한가지 여기에 덧붙여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을 만화화하는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가벼운 문제제기이다.
만화의 충실한 독자들이라면 지난 90년대 후반 오세영이 『빅점프』의 지면을 빌어 전개했던 「한국 중단편 문학관」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오세영은 이 시리즈에서 특유의 리얼리즘적인 묘사력을 십분 발휘하여 소설을 '충실하게' 그림으로 옮겨놓은바 있다.
'충실하게'. 그런데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소설을 만화화한다는 것은 글로 된 묘사를 그림으로 형상화한다는 것과 얼추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일까?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글과 그림을 적절히 결합시킨다는 기술적인 요소 이외에, 글로 할 것인지 그림으로 할 것인지 혹은 다른 어떤 방법을 취할 것인지에 대한 자유분방한 그리고 당연히 누려야할 선택권이 작가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창작과정에서 작가는 이에 대한 판단을 끊임없이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오세영의 「한국 중단편 문학관」은 탁월했으나, 반면 만화의 독자로서 느꼈던 답답함이란 어쩔 수 없었을 듯하다. 반면 『프린세스 안나』를 예로 든다면, Scene6에서 노아가 립스틱을 줍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이 상식적인 이야기에 대한 새삼스런 되새김질이다. 소설이 글이라고 해서 만화가가 그것을 그림으로 옮겨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한 면을 가득히 문자로만 채우거나 혹은 아예 백지로 남겨놓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만화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소설을 만화로'라는 전제에 함몰된 경우를 알고 있다. 로토스코프 기법을 사용하여 『반지의 주』를 애니메이션화했던, 최대한 소설의 만화화에 충실했던 랄프 박시의 시대착오적인 시도와 좌절을 이제 와서 다시 되풀이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신인다운 신선함과 파격 그리고 신인답지 않은 정교하고 압도적인 작화를 겸비한 작가 변병준. 작품연보라고 해봐야 두세 줄에 불과한 신인작가 변병준의 필력이 한국 만화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새로운 화두를 제기하기를 바란다. 또한 "적어도 나는 만화를 외면하지 않아", 라고 말할 수 있는 독자라면 꼭 한 번 『프린세스 안나』의 감동을 마주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