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해결이 부재한 세계의 현실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때 거인처럼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실상이 소설에 나오는 난쟁이와 꼽추, 앉은뱅이처럼 낮은 목소리와 시선으로 이 차가운 대지 위에서 필사적으로 절규하고 있다. 이제 오늘의 난쟁이들은 난쟁이 김불이가 꿈꾸었던 달나라도 수학 선생이 도피하고자 했던 소혹성도 찾을 만한 여력조차 상실한 듯 보인다. (…) 이 축소된 세계야말로 꼽추가 질문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거인들을 지배하는 화폐경제가 아니라, 이렇게 작고 평등하고 친밀하고 정의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이 진정한 난쟁이들의 해결책인 것이다. 이것은 마을 규모로 축소된 자치 공동체다. 그곳에는 ‘억압’, ‘불공평’, ‘폭력’, ‘공포’가 없다. 이런 세계는 없는 세계가 아니라, 과거에는 있었으나 이제는 망각된 세계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오래된 미래를 상기하라고 말한다.
---「꼽추와 앉은뱅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중에서
《밀양을 살다》에 등장하는 밀양 주민들이 말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자립과 자치와 자연의 삶 자체이다. 이들은 그런 삶은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식의 당위적 원리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온몸으로 고백하고 증언하고 있다. 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게 될 때, 밀양 주민들의 이야기를 읽고 느끼고 공명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전경찰국가가 저 신화에 나오는 키마이라처럼 합체가 되어 밀양에 건설하려는 765킬로볼트 송전탑이 파괴한 것은 할매·할배들의 삶 자체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자체였으며, 마을 공동체였음을 비로소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밀양을 살다》는 한전경찰국가 동맹의 비인간적인 목소리들에 맞서 삶을 재구성하고, 관계를 재구성하며, 사회(마을)를 재구성하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목소리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전기 문명이 밝히는 빛이 계몽의 빛이 될 수 없음에 동의하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밀양 주민들은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예찬하고, 자급과 자립의 경제를 지지하며, 자치의 정치학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삶의 주체, 싸움의 주체로 살다」중에서
《우리동네》는 인물을 내세우면서도, 관권 개입, 교육, 부동산, 노농, 농민 공동체 등 농촌 사회의 다양한 현안들을 사건화해 다루었다. 이를 통해 이문구는 1970년대 농촌 사회가 ‘농업 근대화와 농민 공동체’의 첨예한 대결의 장이었음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새마을운동’이라는 관 주도의 개혁 운동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했다. 새마을운동은 경제적 측면에서 농가 소득 증대를 가져올 수 있는 방편을 제시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립적이었던 농촌 경제를 종속화의 길로 이끌었다. 자치는 물적 토대인 경제적 자립 역시 중요하다. 가장 자립적이고 자율적일 수 있는 농촌 경제는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오히려 종속적이고 기형적인 형태로 변하고 말았다.
이러한 관의 개입 아래 소농은 몰락해 가고, 농촌 경제는 산업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자립성을 잃고 종속화되어 갔다. 농촌은 온전한 의미에서 자립과 자치가 가능한 곳이다. 자립적 농민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착취하지 않고, 착취당하지도 않으면서 농업 경영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농촌 경제가 1970년대부터 위태로워졌고, ‘상호 협동적인 농업 공동체는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농업 근대화와 농민 공동체의 첨예한 대결」중에서
우리 사회는 ‘냉소적 사회’로 변질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의 일상이 이상이 되고, 우리의 이상이 일상이 되는 사회와 세상을 꿈꾸고 실현한다는 것은 분명 난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터와 삶터의 분리 현상을 더 이상 방치하지 않으며, 작업장의 안과 밖에서 우리 자신이 함께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공동체를 꿈꾸고 실천한다는 것이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 스스로 불안과 자발적 굴종의 태도를 버려야 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일상의 네트워크를 신뢰하고 거기에 참여해야 함 또한 당연하다. 이것이 일상의 혁명을 위한 단초가 되지 않을까. 혁명이라는 영어 단어는 원래 천체의 '회 전'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지금 당장 '나부터' 자신의 내면과 일상을 경쟁에서 협력의 문화로 회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의 힘에 맞서는 진짜 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