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야, 요즈음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고, 달이 보이지 않아도 내 세상은 찬연히 빛나고 있구나.”
“설마 네가 내 별이고 달이다,라고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시지요? 전하.”
별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원범을 바라보았다.
“그리 말하려고 하였다.”
원범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별이도 장난기 먹은 웃음을 거두고 눈빛을 반짝였다.
“내가 지금 네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와서 내가 얼마나 기쁜지, 네가 내게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별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물먹은 별이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왜 울려고 하느냐?”
“모르겠사옵니다. 그냥 눈물이 나려 하옵니다. 너무 행복해서겠지요.”
“앞으로 우리가 행복할 날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그때마다 눈물을 흘릴 것이냐?”
“아니오.”
그러면서도 별이의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지 마라.”
원범이 손으로 별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별이가 코를 훌쩍이며 미소를 지었다.
원범이 별이의 손을 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싱그러운 후원의 여름 향기가 두 사람의 가슴속까지 은은하게 퍼져 왔다.
두 사람은 연경당에 당도하였다. 반가움과 설렘에 별이가 먼저 알은척을 하였다. 연경당. 그 이름만 들어도 그날 밤의 행복했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돋아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곳은 연경당이 아니옵니까?”
“그래, 우리가 혼례를 올린 곳이다.”
“예. 전하와 함께 이곳에 꼭 다시 오고 싶었사옵니다.”
“창덕궁의 수많은 전각들 중에서 왜 이곳을 우리의 혼례 장소로 택했는지 짐작하겠느냐?”
“글쎄요, 신첩 거기까지는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다만 전하께서 좋아하는 곳이라 생각했을 뿐이옵니다.”
“좋아하는 곳이다. 이곳에 오면 늘 네 생각을 하곤 했다. 연경당은 궁궐 안에 지은 민가이다. 지아비가 기거하는 사랑채가 있고, 지어미가 기거하는 안채가 있다. 대궐 안에 있긴 하지만 이곳에서는 왕이 아니라 지아비로, 승은 상궁이 아니라 지어미로, 평범한 부부답게 살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하였다.”
원범이 대문을 가리켰다. 신선이 산다는 장락궁에서 그 이름을 따온 장락문이었다. 이 문을 넘어서면 모든 걱정과 근심을 잊고 신선처럼 살라는 바람이 담긴 문이었다.
“자, 부인. 모든 걱정과 근심은 내려놓고 안으로 드시지요.”
원범과 별이가 연경당 안으로 들어섰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별이의 미소가 환하게 드러났다.
“아침이면 나는 등청하듯이 편전으로 가고, 저녁이면 퇴청하듯이 집으로 돌아오고, 너는 여느 부인네처럼 나를 보내고, 기다리고, 맞이하고, 또 내가 집에 있을 때에는 안뜰을 흘깃하면서 사랑채 마당을 거닐기도 하고, 너는 내 생각을 하며 사랑채를 바라보고. 아! 그리고 봄에는 후원 논에 나가 모도 심자꾸나. 청의정에서 새참도 먹고. 여름이면 옥류천에서 탁족도 하자. 또 가을에는…… 별이야!”
원범이 소리쳤다. 심규가 검을 빼 들고 원범을 엄호했다. 심규의 명을 받고 숨어서 뒤를 따르던 내금위 두 명이 급히 움직였다.
“전하!”
별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휘청거렸다.
“별이야!”
“전하, 이것이 꽂혔습니다.”
별이가 편전 하나를 들어 보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별이의 가슴에는 여전히 편전 두 개가 꽂혀 있었다. 별이의 저고리 위로 피가 꽃물처럼 번져 나왔다.
“전하, 신첩을 저 방에 데려다주세요.”
“그래, 별이야.”
“소신이 모시겠사옵니다.”
“아니다. 과인이 하겠다.”
원범이 양팔로 별이를 들어 올렸다.
“신첩 저 방에서 전하와 쉬고 싶습니다. 평범한 지아비와 지어미처럼요.”
“그래, 별이야, 알겠다. 그러니 더는 말하지 마라.”
별이를 안은 원범이 안채를 향해 달리면서 물었다.
“별이야, 괜찮으냐? 쉬고 나면 괜찮아지는 게지? 괜찮은 게지?”
“예 전하.”
말이 끝나자마자 별이의 팔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별이야!”
원범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별이가 눈을 감았다. 그믐밤은 적막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