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하고는 참…. 누가 승당 선생의 자손이 아니랄까봐서? 하지만 나를 너무 나무라지 말게, 이 사람아! 우리 해외 유학파들 중에도 자네와 같은 강골은 많아! 그리고 날카로운 무쇠 창과 명검만이 적의 숨통을 끊어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부드러운 그물이나 통발로도 더 크고 많은 물고기들을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는 것도 좀 알아주시게나.”
그들이 이렇게 현실 대응 방식에 대하여 각자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국화원(菊花園) 마당까지 와 있었다. ---「산사를 다녀오던 날」중에서
“그래, 무봉사에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중사랑으로 찾아가 예를 갖추고 자리에 앉았을 때,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필운 선생은 그것부터 먼저 물었다.
“한발 늦어서 청관(淸灌) 스님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장인어른!”
중산은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쉰다. 그가 첫돌을 맞이한 아들의 축수 불공을 핑계 삼아 운사와 함께 동부인하여 무봉사에 가게 된 것도 사실은 청관 스님을 자연스럽게 한번 만나 보려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나지 못했다고? 왜?” ---「일락서산(日落西山)」중에서
핏빛 노을에 물들어 있는 강물처럼 그의 퉁소 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애조를 띠어 가고 있었다. 정말로 오늘 따라 김 서방은 피를 토하며 봄밤을 새워 운다는 두견새보다도 더 서러운 악공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그도 어쩔 수 없이 서러운 한 민초의 자리로 돌아와 그렇게 처절한 가슴으로 신들린 사람처럼 퉁소를 불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우국(憂國)의 밤」중에서
“노마님께서 멀리 있는 표충사(表忠寺) 큰절에 불공을 디리러 가신다 하십니다!”
그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안채로, 사랑채로, 행랑채로 전달되어 순식간에 온 집안으로 퍼져 나갔다.
“표충사 큰절에 불공을…?”
김 서방으로부터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중산은 자기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 벼락으로 소실된 표충사 대광전의 중건을 위한 시주금 모금 불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져서 온 밀양 땅이 들썩거렸을 때, 그 중건 시주 공양물로 일백 석이 넘는 나락을 소달구지로 직접 실어다 바쳤다는 얘기는 들은 바는 있어도 승당 할아버지 사후에 있었던, 유림들의 정서에 반하는 사십구재와 극락왕생을 위한 천도제 때를 제외하고는 용화당 할머니가 손수 불공을 드리러 나서기란 전에 없이 보기 드문 일이었다. ---「운막향(雲幕鄕)의 후예들」중에서
청관 스님에 대한 얘기가 일단락되자, 운사는 그동안 밀양읍 교회에 예배를 보러 다니면서 알게 된 [밀양청년독립단]에 대한 얘기를 슬며시 끄집어내면서 중산의 반응을 눈여겨 살피는 것이었다.
“이보게, 중산!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더니, 이번에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보니 내가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별천지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네!”
“예수교도 불교처럼 내세를 믿는다고 하더니만, 벌써 그 사이에 천당인가 하는 곳을 미리 구경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내가 접하게 된 것은 내세가 아니라 분명한 현실이었네! 밀양읍 교회와, 일제의 [종교 통제령]으로 이미 간판을 내렸다는 대종교 밀양지사 말일세! 알고 봤더니 거기가 바로 조선 독립군을 키우는 산실이자 왜놈들을 몰아낼 인재 양성의 복마전(伏魔殿)이나 다름없기에 하는 말일세!”
“자네 교회와 대종교 밀양지사에서 조선 독립군을 키운다고?” ---「운명의 그림자」중에서
“동산리 여흥 민씨 집안에서도 조선왕조를 복원시키고자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비록 공화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우리 대종교와 이념적으로 다소 거리가 있으나 대한의 독립이라는 큰 목표는 똑같지 않소이까?”
“선생님, 젊은 인재들을 불러 모아 훌륭한 독립 일꾼 양성에 헌신하고 계신다는 얘기는 그동안 운사 친구로부터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도움은 못 드리더라도 선생님께서 하시는 일에 약소하나마 힘을 좀 보태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중산은 도포 속의 허리에 차고 있던 전대(錢帶)를 풀어내어 을강 선생에게 두 손으로 바친다.
---「종손(宗孫)의 반역」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