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전북 장수 출생. 연세대 졸업. 1959년 조선일보 입사.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부국장 등을 지냄. 현재 조선일보 논설위원. 저서로『한국인의 의식구조』(전4권)『서민의 의식구조』『선비의 의식구조』『서양인의 의식구조』『동양인의 의식구조』『뽐내고 싶은 한국인』『한국 여성의 의식구조』(전2권)『한국인의 정서구조』(전2권)『한국학 에세이』(전2권)『신열하일기』『한국인, 이래서 잘산다』『한국인, 이래서 못산다』,『한국인의 밥상 문화』(전2권) 등이 있다.
충효리는 김덕령 장군이 태어난 마을이다. 그 마을에 있는 취가정은 김 장군이 나뭇짐을 벗어놓고 취시가를 불렀던 바로 그 옛터다. 석저산 두메, 성안이란 골짜기는 김 장군이 뛰어 놀던 놀이터요, 바위 하나 널펀하게 내민 것은 김 장군이 낚시를 드리웠던 조대라 한다. 무등산 문바위는 김 장군의 과녁이요, 의상대 뒷줄기 칼등같이 내려온 주검은 김 장군이 들어서 세우고 발로 차 누인 것이라 한다. 또한 '너덜', '너덜겅'하는 골짜기 지명들은 김 장군이 바위를 굴렸던 그 바위 구르는 소리를 딴 것이다.
무등산에 있는 것은 비록 그것이 한아름 바윗덩이요, 한 주먹의 풀일지라도 김덕령 장군에게 붙들어 매지 않으면 존재 이유를 상실할 것같이 그 이름을 붙잡고 늘어진다.
이 전설의 현장들을 손가락질해주는 이곳 주민들은 예외없이 '덕령이 미역 감던데!', '덕령이 말 몰던데!', '덕령이 낙상했던 바위'니 마치 제 손자 이름 부르듯이 덕령이 덕령이 한다. 모함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 민족적 영웅에 대한 불손한 호칭임이 분명한데 왠지 불손하다는 생각보다 친근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건 무엇 때문일까. 단지 선조들이 그렇게 불렀기에 그들도 그렇게 부를 따름이다. '김덕령 장군'하면 어쩐지 그들이 알고 있는 친근한 덕령이 아닌 것 같다며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사람이 잘나면 나라를 위해 잘났다든지 역사를 위해 잘났거나 문명을 위해 잘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덕령이 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이순신 장군더러 '순신이'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