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전북 장수 출생. 연세대 졸업. 1959년 조선일보 입사.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부국장 등을 지냄. 현재 조선일보 논설위원. 저서로『한국인의 의식구조』(전4권)『서민의 의식구조』『선비의 의식구조』『서양인의 의식구조』『동양인의 의식구조』『뽐내고 싶은 한국인』『한국 여성의 의식구조』(전2권)『한국인의 정서구조』(전2권)『한국학 에세이』(전2권)『신열하일기』『한국인, 이래서 잘산다』『한국인, 이래서 못산다』,『한국인의 밥상 문화』(전2권) 등이 있다.
충효가 겸전하는 것은 이상적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따라 겸전하지 못하고 그 중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상황에서 우리선조들은 무척 고민하였다.
이는 옛날부터 선비들의 쟁점이 되어 왔고, 또 한국인의 가치관을 갈라 놓은 중요한 분기점이었으며, 한국인의 행동 방식을 규제시켜 온 사상의 주형이기도 했다. 선충 후효냐, 선효 후충이냐의 쟁점이 논의될 때마다 거론 된 것이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한 최부였다.
최부는 성종 18년에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갔다가 이듬해 정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을 치르기 위해 육지에 나가고자 배를 탔다. 그런데 이 배가 큰 바람을 만나 표류하기 시작하여 함께 탄 43명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죽기만 기다리다가 표류 11일 만에 섬에 닿아 마른 목을 추겼고, 13일째는 중국 영파부 근처에서 해적을 만나 가졌던 금품을 모조리 약탈당했다. 16일 만에 태주에 표착했으나 왜적으로 오인받아 온갖 고문을 받다가 방면되어 육로로 북경, 의주를 거쳐 서울 청파역에 도착한 것은 그해 6월 14일이었다.
이 험난한 표류 끝에 돌아온 최부는 성종에게 그 표류기를 써 바치고서야 복을 입으러 내려갔다. 최부는 선충 후효였던 것이다.
최부는 평소부터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그 한 실례를 들어보자. 그가 응교 벼슬에 있을 때 휴가를 얻어 정언 벼슬의 송흠과 더불어 고향길에 올랐다. 그의 고향은 나주고 송흠의 고향은 영광이었으므로 집이 시오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휴가중 어느 날, 송흠이 최부의 집을 찾아왔다. 최부는 올 때 무슨 말을 타고 왔느냐고 물었다. 송흠이 역마 한 마리를 차출하여 타고 왔다고 말하자, 최부는 "왜 사사로운 방문에 공용의 말을 타고 왔느냐."하고 나무라며 방문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상경 후 이 일을 문제 삼아 송흠을 파직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