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는 즐거움이다. 아이가 졸린 눈으로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의 팔베개를 베고 듣는 옛날이야기는 당연히 기분 좋은 감정으로 이어진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 듣기, 책 읽기’가 긍정적 감정과 연결되면 그 경험은 아이가 성장한 후에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아이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지혜를 얻으며 남들과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도구인 이야기의 마법 같은 힘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마와 아빠가 이야기를 만들고 들려주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그 어떤 목적도 염두에 두지 않고 하나의 놀이로서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그 다음이다. --- 「1. 이야기의 기쁨」
어떤 아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행동이 앞선다. 그런 아이들은 경험의 외연을 넓히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또 어떤 아이는 예민한 성격을 타고나서 작은 자극도 풍부한 정서적 경험으로 해석해낸다. 그런 아이에게 ‘아이답지 않다’며 강제로 새로운 경험을 주입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책 역시 마찬가지다.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는 늘 공룡 그림책만 읽어달라고 한다. 엄마 아빠 입장에서는 난감할 수 있다. ‘다른 책도 좀 읽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아이에게 책에 대한 취향이 싹틀 때부터는 부모의 관점을 강요해서는 곤란하다. “그 책은 안 돼!”라는 쉬운 관심의 표현 대신, 그 책이 왜 좋은지, 어떤 점이 재미있는지 아이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 막 책을 만난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다. 책의 즐거움, 자신의 취향이 존중받는 경험, 새로운 공룡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면서 시나브로 느끼는 배움의 유용함이다. 존 로크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아이들의 교육에서 ‘즐거움’과 ‘재미’, ‘놀이’를 강조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 「4. 이야기의 역사」
결국 도덕적 상상력을 키우는 것은 앞서 말한 놀이로서의 이야기, 또 대화로서의 이야기이다. 그 역할극에 아이가 참여함으로써, 대화를 통해 그 입장을 깊이 상상하게 됨으로써 아이는 성숙한 공감 본능을 키우게 된다. 그것은 로봇이 선과 악을 갈라 싸우는, 엉망진창인 이 시대의 사회풍조와 비슷해 보이는 낮은 차원의 이분법적 도덕론이 아니다. 저 친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상상하고, 함께 나비를 잡으러 다니거나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공감의 도덕론이다. 이는 칸트의 생각처럼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는 도덕성의 튼튼한 지지기반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아이에게 선과 악을 나누어 가르치기에 앞서,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어조로 대화하자. 놀이로 이야기를 경험하고 상상하게 하자. 아이 역시 자라면서 ‘이건 백 퍼센트 옳은 거야! 내 행동은 착한 일이었어’라며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을 때가 올지 모른다. 혹은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고 미워하고 싶은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때, 마음속에 심어진 공감의 도덕론이 빛을 내기 시작할 것이다. 처음에는 강렬하지 않지만 점차 선명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마음을 적시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자기 마음의 갈등, 그 속에서 피어난 고통을 들여다보며 상상하고 공감할 것이다. 화해하고 용서하며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칸트의 말처럼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자신의 도덕률을 품고 사는 ‘사람’이 될 것이다. --- 「5. 이야기와 윤리」
이야기가 스테이크라면 책, 스마트폰, TV는 그릇이다. 아이 입장에서는 지글지글 신기한 소리를 내는 철판(스마트폰)에 더 마음이 끌릴 수 있고, 평범한 흰색 접시(책)가 따분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스테이크가 ‘소중한 영양공급원’이 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뜨거워서 손을 델 수 있으니 철판 스테이크는 무조건 안 돼!”라고 말하기보다는, 테이블 매너와 스테이크의 맛을 즐기는 법을 가르치는 게 올바른 접근이다. 실제 스마트폰이 아이의 정서나 뇌 발달을 해친다는 연구의 이면에는 ‘중독’이라는 무서운 단어가 뒤따른다. 스마트폰 중독만큼 ‘독서 중독’이나 ‘활자중독’ 역시 나쁠 수 있다. ‘중독’은 병적인 지나침을 의미하므로 어떤 경우에도 나쁘기 때문이다. 실제로 또래들, 엄마 아빠와 놀며 다양한 경험과 세계를 경험해야 하는 아이가 방에서 골똘히 책만 읽고 있다면 정말 걱정스럽지 않겠는가?
이러한 유아기의 ‘중독’이 발생하는 이유는 대부분 환경적 무관심이나 방치에서 비롯된다는 혐의가 짙다. 우리는 연구 결과만 보고 “스마트폰이나 TV는 나빠!”라고 쉽게 말하지만, 연구 설계의 이면을 따져봐도 그럴까? 단순히 아이가 스마트폰을 봐서 성장 발달이 뒤처지는 게 아니라, (다양한 신체활동과 경험을 등한시한 채) 지나치게 오랜 시간 동안 스마트폰에 노출될 정도로 무관심한 육아 환경이라는 조건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그건 스테이크를 어떤 그릇에 담는가의 문제보다 앞선,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까? --- 「6.이야기와 미디어」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