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시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사를 전공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를 수료하고 독립기념관 연구원과 고려대학교 강사를 거쳐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대응』, 『백년동안 한국 불교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불멸의 민족혼 되살려 낸 역사가 박은식』 등이 있으며 한국근현대불교사와 근현대유학사를 공부하고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을 전후로 일본은 조선 침략을 노골화하였다. 이 시기 독립과 국권의 유지를 위하여 서구 문물의 수용이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유림이 증가하였다. 이들이 받아들인 문명개화론과 사회진화론은 근대국가를 지향하던 대한제국에 서구 문물의 도입을 정당화시켜 주는 이론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일부 유림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국권 상실 이후 조선 총독부의 시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친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사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로 지식인들 가운데는 우리 민족이 생존경쟁에서 패배하여 장차 멸망에 이를 것이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다. --- p.51
조선에서 유교의 종교화운동은 20세기 초에 전개되었다. 박은식·장지연을 중심으로 한 대동교운동이 있었고, 이승희(李承熙)는 1908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인 사회에서 공교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병헌(李炳憲)·송기식과 박장현의 공교운동은 제각기 조금씩 그 주장하는 것이 다르다. 하지만 크게 보면 시대적 위기를 구할 수 있는 대안을 공자교운동에서 찾았다. 이들의 공자교운동은 1925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된다.--- p.163
황도유학이란 일본의 신국사상, 즉 천황을 살아 있는 신으로 섬기는 신도를 유교의 왕도정치와 결합시켜 만들어 낸 충효일치(忠孝一致)의 일본화된 유학였다. 일제가 황도유학을 내세운 것은 조선 민중으로 하여금 일본의 침략 전쟁에 자진하여 인적·물적 자원을 바치도록 강요하는 침략 논리를 뒷받침 하려는 것이었다. 황도유학은 유학에서 이상적인 정치 형태인 왕도정치를 일본의 천황제와 결부시켜 황도유학이라고 변조한 것이었다.--- p.182
총독부는 조선을 강제 병합하는 과정에서 유교계의 강한 저항을 경험하였다. 그런 까닭에 조선 지배를 시작하는 과정에서 유림 세력을 회유할 필요가 있었다. 총독부는 유교 지식인 상층부에 이른바 ‘상치은사금(尙齒恩賜金)’과 작위 수여라는 방식으로 유림을 회유하였다. 이 정책은 일정한 효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지만 많은 유교 지식인들은 그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하고 자정순국(自靖殉國)의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총독부는 1911년 6월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을 폐지하고 경학원을 설치하였다. 경학원의 설립 목적은 “경학 연구를 통해 풍속덕화를 비보하기 위하여”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경학원에는 경학을 연구하기 위한 아무런 제도적인 장치도, 인력도, 사업 방침도 없었다. 다만 성균관의 주된 두 가지 기능 즉 교육과 제향 기능 가운데 교육 기능을 없애고 선현에 제향하는 석전제를 봉행하고 총독부의 정책을 홍보하는 강연과 기관지인《경학원잡지》를 발행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교육기관에서 교육과 연구 기능이 제거된 경학원은 석전제를 봉행하는 것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단순 기구로 전락하였다. 총독부가 성균관의 교육 기능을 제거한 것은 조선인들이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면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식민 통치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