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라, 가을 바람. 캄캄한 벌판 위를 휩쓸어라. 숲속의 흐름이여, 외쳐라. 폭풍은 떡갈나무 가지 끝에 울부짖어라. 찢어진 구름 틈서리로 달은 누비며, 핏기 가신 네 얼굴을 보여나 다오. 저 무서웠던 밤을 생각나게 해 다오. 내 아들, 힘센 아린달이 쓰러진 밤을, 귀여운 다우라가 숨진 그 밤을.
150 p.
분명 나는 황홀한 기쁨과 비유와 열변에 빠져 버렸고, 그로 인해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자네에게 상세히 이야기하는 것을 잊고 말았네. 어제 보낸 편지가 단편적으로 말해 주는 바대로 나는 완전히 회화적(繪畵的)인 기분에 잠겨서 두 시간쯤 그 쟁기 위에 앉아 있었다네. 그러자 저녁 무렵 어떤 젊은 부인이 조그만 바구니를 팔에 걸고, 그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던 그 아이들에게로 다가오며 멀리서부터 “필립스야, 너 정말 착하구나.” 하고 외쳤네. - 그녀가 내게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하고 일어서서 그리로 가까이 다가가서는 아이들의 어머니냐고 물어 보았지.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을 하고 큰아들에게 밀가루 빵 반쪽을 건네 주고는 아이를 안아 올리더니 어머니다운 애정을 쏟으며 키스를 해 주더군. - 그러더니 그녀는 “필립스한테 어린 것을 맡겨 두고 저는 맏아들을 데리고 흰 빵과 설탕과 죽을 끓일 오지그릇을 사러 시내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하고 말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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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4일
내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네. 오늘 그녀의 눈빛은 내 마음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네. 내가 찾아갔을 때 그녀는 혼자 있었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네. 예전과 같은 사랑스러운 아름다움과 뛰어난 지혜의 밝은 빛은 이미 보이지 않았네. 그런 것들은 모두 내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네. 그것보다도 훨씬 더 빛나는 눈빛이 나에게 쏟아지고 있었네. 거기에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걱정과 괴로움에 대한 너그러운 공감의 뜻이 가득들어 있었네.
어째서 그녀의 발아래 몸을 던져서는 안된단 말인가! 어째서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수많은 키스로 그에 보답해서는 안된단 말인가! 로테는 피아노 곁으로 몸을 피해 가서는 , 피아노를 치면서 은은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노래를 불렀네. 로테의 입술이 그때처럼 아름다웠던 것을 지끔껏 보지 못했었네. 그 입술은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소리를 들이마셔 그 나직한 반향만이 메아리치는 것 같았네. 그 모습을 그대로 자네에게 전해 줄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머리를 숙이고 이렇게 맹세했네.
"성스러운 입술이여, 하늘의 성신이 감돌고 있는 그 입술에 결코 입을 가져다 대는 일이 없으리라."
그러나 사실 나는 단념할 수가 없었네. 아아! 그것이 내 영혼 앞에 장벽처럼 서 있었으니. 이 행복을 맛보고, 이것을 범한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파멸해 버리고 싶네. 그러나 이것이 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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