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봉이 펴서 보니 글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금동이의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소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일만 백성들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의 소리 높았더라.
하는 뜻이었다.
"아, 여보시오, 운봉! 크게 좀 읽어보시오."
그러나 크게고 작게고 지금 그러한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
아뿔사! 일은 났구나! 하고서 운봉은 종이를 쥐고 있는 손이 사시나무처럼 덜덜덜 떨려오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읽었는지 말았는지 하고서 종이를 좌중앞에 내던진 운봉은 대청 아래로 내려서면서 신을 꿰어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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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들으옵소서. 말 못하는 까마귀도 겨울 숲에 해가 지면 먹을 것을 물어다가 어미를 먹일 줄 알고, 곽거라고 하는 사람은 부모께 효도하여 찬수(반찬거리) 대접 극진할 제, 세살 난 어린것이 노모 밥상 달린다 하여 양주가 의논하고 산 자식을 묻으려 하였으며, 또한 맹종은 효도가 지극하여 엄동 설한에 죽순을 얻어다가 부모 봉양하였으니, 소녀 이미 십여 세라, 옛 효자들만은 못할망정 어찌 맛있는 음식을 드리지 못하오리까. 눈 어두우신 아버지가 험한 길 큰길을 다니시면 다치기 쉬우며, 비바람을 무릅쓰고 나다니시면 병환 나실까 염려되오니, 오늘부터 아버지는 집에 앉아 계오시면 소녀 혼자 밥을 얻어 조석 걱정 덜겠사옵니다.' …(중략)…
'우리는 본디 황성 사람으로서, 장사차로 배를 타고 만 리 길을 다니는데, 배 가는 길목에 항상 물살이 변화 무쌍한 임당수라는 데가 있어 자칫하면 몰사를 당하기 쉬운지라, 십오 세된 처녀를 제수(祭需)로 물에 넣고 제사를 지내오면 수로 만리를 무사히 왕래할뿐더러 장사로 흥왕하옵기로 생업이 원수라 사람 사러 다니오니 몸 팔겠다는 처녀 있사오면 값은 개의치 아니하고 주겠소.'
--- p.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