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정읍 출생으로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으며 1966년 《문학춘추》《문학》지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데뷔했다. 역사에 대해 탁월한 식견과 안목을 가지고 있는 그는 역사물에도 발군의 역량을 보이고 있다. 저서로는 소설집으로『골목안 삽화』, 장편『자유 불행한 자유』『화려한 연대기』『우리 시대의 데카메론』『유리상자속의 사랑』『짧은 사랑 긴 이야기』, 어린이를 위한 책으로『족보이야기』『이야기 사기열전』, 역사서로『이야기 한국고대사』, 역사소설『소설 택리지』『용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려 태조 왕건』등이 있다.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당해 사가로 나가 머문 지 5년, 그동안 김춘택, 강만태, 한중혁 등이 복위운동을 은밀히 펼쳤다. 은을 모아 궁중의 시녀들을 매수하고 사대부들과 긴밀한 역락을 취하고 있었다. 특히 김춘택은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손자로,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세력을 잡자 화를 가장 심하게 당하여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30여 년간이나 감옥, 유배 생활을 했다. 김춘택은 남인에게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다.
남인의 실력자 민암이 눈치를 채고 금영군관 최산해의 매부 함이완을 포섭하여 김춘택 등이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려 한다고 고변토록 했다. 김춘택 등 10 여명이 줄줄이 엮어 잡혀갔다. 갑술년 4월 초의 일이었다.
민암 등은 김춘택 등의 공초를 받아 폐비 복위운동 사실을 자백받아 사형을 집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공초 과정에 석연찮은 점이 몇가지 있었다. 한중혁, 이시회, 최격 등은 1차 형벌을 가해 심문했으나 끝까지 불목했다. 그리고 증언자들의 진술이 앞뒤가 맞지 않고 오락가락 했다.
그 즈음 숙종인 폐비 민씨를 그리워하는 날이 많았다. 원자를 낳아 하루아침에 왕비가 된 장씨의 행동이 갈수록 도를 넘었고, 내명부에 늘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장씨의 오라비 희재는 금군별장직에서 일약 총융사가 되어 남인들과 짜고 권력을 휘둘렀다. 숙종은 남인들에게 싫증이 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