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는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선공주의 손자였다. 남이의 조부는 태종 때 영의정까지 지낸 남휘였다. 1457년(세조 3)에 무과에 장원했고, 세조 13년에는 길주의 호족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앞장서서 토벌작전에 참여해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 뒤에도 남이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남이를 우상대장으로 삼는다! 남이는 서북변의 여진족 건주위를 토벌하도록 하라!” 세조는 남이에게 군사를 이끌고 나가 여진족을 토벌하게 했고, 남이는 여진족장 이만주를 참살하고 대승리를 거두었다. “여진족 토벌의 공을 인정하여 남이를 공조판서에 임명한다!” 그때 남이의 나이가 28세였다. ---‘남이의 옥사’ 중에서
연산군은 학문을 몹시 싫어했다. 신하들의 간언에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림파는 연산군에게 끝없이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고, 연산군은 차츰 사림파를 귀찮아하기 시작했다. “저 사림파를 없애기 전에는 내가 편히 왕 노릇을 할 수 없겠구나.” 결국 연산군은 김종직 등 사림파가 가까스로 몰아냈던 유자광 세력을 다시 끌어들였다. “사림을 배척하려면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척세력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유자광을 끌어들인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종직 문하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김종직은 이미 세상을 뜬 뒤였지만, 다시 무덤을 파 관을 꺼낸 뒤에 시신을 다시 한 번 죽이는 부관참시 형을 내렸다.---‘연산군의 폭정’ 중에서
“예로부터 어진 임금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바른 사람만을 등용했기 때문에 임금께 무슨 잘못이 있으면 신하는 싸우면서까지 이를 바로 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면 임금은 그에게 성가신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간사한 무리들이 틈을 타서 임금의 비위를 맞추게 되는데, 임금이 자기 마음에 든다고 이런 사람들을 쓴다면 임금은 간악한 소인들과 한 무리가 되게 마련이고 간신들은 활개를 펴고 못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이 점을 마음에 새기시고 정치를 펴나간다면 나라에는 어지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선조는 이황이 떠나는 것을 몹시 가슴 아파했다. “표범 가죽의 요 하나와 후추 두 말을 내리고 경상도감사에게 명을 내려 쌀과 콩을 지급하도록 하라!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타고 갈 말을 마련해 주고 군졸을 시켜 호위하도록 하라!” 선조는 세심한 데까지 마음을 써주었다. 그것이 이확과 선조의 마지막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