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의 침입은 고려 땅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고려는 수군을 증강하고, 화기 개발에 힘쓰는 한편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 우리가 대마도를 정벌한다!” 1389년(창왕 1), 고려 조정은 대마도 정발을 감행했다. 박위는 전함 100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하여 왜선 3백여 척을 불태웠다. 김종연, 최칠석, 박자안 등도 공격을 감행해 끌려 간 고려인 1백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대마도 1차 정벌은 대승을 거두었고, 고려는 왜국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그 뒤, 공양왕 무렵에는 왜구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고려는 왜구의 잦은 공격으로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최영과 우왕은 무리한 요동정벌 감행했고, 결국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동래현을 침입한 왜구’ 중에서
인재를 널리 찾는 세종의 명은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동래 현감이 장영실을 불렀다. “관찰사께서 너를 조정에 추천했다고 하니 서둘러 한양으로 올라가도록 해라. 이곳에서 네 뛰어난 실력으로 농기구 등 많은 기구를 발명해서 크게 도움을 주었던 것처럼 앞으로는 나라를 위해 네 솜씨를 발휘하도록 해라.” “추천해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성심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그동안 동래 관아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장영실은 현감과 관찰사의 추천을 받아 한양으로 올라왔다. 그때가 1423년(세종 5)이었다. 그렇게 인재를 널리 구하고 있던 세종의 눈에 장영실은 뛰어난 보석과 다를 바 없었다. “참으로 놀라운 실력을 지녔구나! 하늘이 우리 조선을 위해 내린 인물이다!” 세종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세종과 장영실의 만남’ 중에서
장영실은 공사의 총감독이었지만 실제로 가마를 만든 사람은 임효경과 최효남이었고, 조순생도 가마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가마는 한달 남짓 걸려 완성되었다. “이번에 새로 만든 가마를 타고 이천의 온천으로 가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훈민정음을 완성하도록 하겠다.” 세종은 음력 3월 16일에 이천에 있는 온천으로 휴양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세종이 이천으로 출발하려는 날, 세종은 새로 만든 연(가마)에 앉고 교군들이 연을 들어 올릴 때였다. “우지끈!”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가마의 기둥이 부러지며 지붕이 푹석 내려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