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에서는 수양대군의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는 것을 염려해, 양평대군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단종의 왕위를 알리는 사은사로 떠나겠다고 자청했다.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달렸다. 내가 나라를 비우면 의정부와 안평대군은 내가 정권에 관심이 별반 없다고 판단하고 경계심을 풀 것이다. 멀찍이 떨어져서 거사를 도모할 필요가 있다.” 수양대군은 신숙주를 데리고 명나라로 떠났고, 그곳에서 신숙주와 치밀하게 거사 계획을 짰다. 그 뒤, 명나라에서 돌아온 1453년 4월부터 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의 조정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윤6월에 단종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수양대군’ 중에서
무오사화가 터진 그 해 조광조는 아버지 조원강이 어천 찰방으로 부임하자 함께 그곳으로 옮겨 갔다. 부친을 따라 어천으로 갔던 조광조는 이미 연산군의 학정이 빚어낸 폐해를 절감하고 있었고, 언젠가는 연산군 시대의 풍조를 요순의 정치로 되돌려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슴에 품기 시작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은 비정상적인 정치현실로 이어지고 그로 인해 야기된 도학적 기풍의 쇠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여전히 혼란기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희천에는 무오사화에서 희생된 김굉필이 유배 와 있었다. 희천과 어천은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다.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 중에서
만일 위훈삭제가 있을 경우 조정에는 일대 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사림세력이 이길 경우 조정은 완전히 사림파에 의해 장악될 판국이었다. 그것은 중종 자신도 원하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나는 사림, 훈구 어느 쪽도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중중은 어떻게 해서라도 조광조의 위훈삭제 주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버텼다. 그러나 조광조를 비롯한 수많은 사림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익의 근원이 열리는 것은 국가의 고질병입니다. 만약 이익의 근원을 통렬하게 막지 않으면 사람들의 이욕에 쉽게 빠져 반드시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대개 공신을 중하게 여기면 공을 탐하고 이익을 탐해서 왕을 시해하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됩니다. 임금이 만약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한다면 이익의 근원을 막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