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사는 즉시 지방관을 찾아가 그 사실을 따졌고, 이 일로 이안사는 지방관과 산성 별감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한 지방의 호족이 자신의 세력을 믿고, 조정에서 파견된 지방관과 산성별감을 누르려 하는 것은 나라에 대한 반역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지방관과 산성별감은 조정에 군사를 요청해 이안사 세력을 없애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를 알게 된 이안사는 고향인 전주를 떠날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있다가는 무사하기 어렵다. 서둘러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야 되겠구나.” 이안사는 전주를 떠나 삼척으로 향했다. 삼척에는 이안사의 외가가 있었다. ---‘고향을 떠난 이안사’ 중에서
“최영의 심복이었던 안소와 정승가, 인원보, 안주, 김약채, 정희계 등은 귀양을 보내도록 한다. 또한 원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다시 명나라 연호인 홍무를 쓰도록 하며, 의복도 몽골식을 버리고 명나라식으로 바꾸도록 한다!”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한 뒤에 가장 큰 마찰은 조민수와의 의견 차이였다. 두 사람은 우왕을 폐위시킨 뒤, 누구를 왕의 자리에 앉힐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여러 날 동안 의견 대립을 했다. “우왕의 아들인 창을 보위에 앉혀야 하오.” 조민수는 창을 보위에 앉힐 것을 주장했다. 조민수는 우왕 무렵에 최고 실권자였던 이인임의 도움으로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조민수가 창을 보위에 앉힐 것을 주장한 것은, 창이 이인임의 외사촌인 이림의 딸 근비와 우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성계와 정몽주의 대결’ 중에서
마침내 1400년 11월 13일, 이방원은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이방원이 조선 왕조의 세 번째 임금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이 무렵에 송도에 머물던 태조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야심이 강하고 세다. 두 번 다시 그 낯짝을 보지 않겠다!” 태조는 고향인 함주(함경도의 함흥)로 내려가 버렸다. 태조는 안변 부사로 있던 조사의를 죽은 신덕왕후 강씨의 몇 안 되는 친척이라 해서 매우 총애했다. 태종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함흥에 머물고 계시는 상왕 폐하의 심기를 풀어 드리기 위해 조사의를 안변으로 보내도록 하라!” 태종은 조사의를 안변으로 보내어 태조의 말벗이 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