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림왕은 백제의 힘에 밀려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백제는 377년 10월에 3만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공략에 나섰다. “빼앗긴 수곡성을 탈환하고 작년에 있었던 고구려 침략을 응징할 것이다!” 백제의 군수구왕은 추수가 끝나고 농한기로 접어드는 때를 적절하게 이용했다. “추수가 끝났으니 군량미가 풍부하고 농사일이 끝났으니 군사도 충분하다!” 반면에 고구려는 전염병이 돌았고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 --- '홍룡으로 태어난 아기' 중에서
“옛날에 천지왕의 손자이신 단군왕검께서 고조선을 세우셨다. 우리는 단군왕검의 후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하늘의 자손이다! 굳세고 강인한 민족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고 슬기로운 민족이다!” 광개토왕은 단군의 숭고한 정신을 백성에게 일깨우며 마을마다 학교를 세우고 소년들이 열심히 학문을 배우고 무예를 갈고 닦게 했다. “강철같이 몸이 단련된 고구려의 청년들이 버티고 있는 한 우리 고구려는 영원할 것이다!” “단군의 위대한 정신을 가슴에 담고 강한 체력과 굳건한 정신으로 뭉쳐서 위대한 나라로 발전시키자!” --- '영락대왕 만세!' 중에서
광개토왕이 육군이 아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한 것은 고구려의 수도가 대동강 변의 평양이 아니고,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가 예성강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고구려 수도가 평야이고, 예성강이 경계였다면 굳이 수군을 동원해 바다를 통해 백제를 칠 이유가 없었다. 해로를 이용할 경우 자칫 풍랑을 만날 수도 있었고, 잘못했다가는 공격 한 번 못하고 퇴각할 위험이 많았다. 이는 당시 고구려의 수도가 한반도 안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즉 고구려의 수도가 대동강 변의 평양이었다면 굳이 위험 부담이 큰 바닷길을 이용해 백제를 공략할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