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은 진흥왕을 찾아가 세종을 멀리 떠나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대가 그토록 불편하다면 도리가 없구나. 세종은 풍월주 자리에 있으니, 전쟁이 터지면 제일 먼저 전쟁터로 달려가야 할 몸이다.” 진흥왕은 미실의 청을 받아들여 세종을 전쟁터로 내보내 버렸다. 세종을 전쟁터로 내보낸 미실은 다른 요구를 했다. “폐지했던 원화 제도를 다시 부활시켜 주십시오.” 진흥왕은 이번에도 미실의 청을 들어주었다. “원화 제도를 부활하고 미실을 원화 자리에 임명하노라!”--- ‘사다함을 잃은 미실’ 중에서
“그런데 왜 굳이 고구려로 가겠다는 것이오?” “고구려의 실질적인 군주는 연개소문입니다. 연개소문은 고개를 숙일 줄 모르는 강한 성격을 지녔고, 야망 또한 대단한 인물입니다. 제가 고구려 땅으로 들어가 원군 요청을 한다면, 우리 신라에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저를 함부로 무시할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고구려로부터 제가 적대적인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당나라에 알리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와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당나라와 우리 신라가 좀더 가까워질 수 있는 외교가 될 것입니다.”--- 김춘추의 분노‘ 중에서
우리 나라 중국 유학의 기원은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다. 당시에는 주로 왕족 자제들을 당나라 국학에 보내어 유학 이론을 듣게 하였다. 이후 많은 신라인들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자연스럽게 유학생의 수가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728년경에 당나라로 많은 신라 학생들이 유학을 떠났는데, 『동사강목』에는 ‘10년을 기한으로 귀국하게 했다’라고 적고 있다. 모두 국비 유학생으로 서적 구입비는 신라에서 은화로 지급하고, 양식은 당나라 관청인 홍로시에서 지급해 ‘오가는 학생이 끊이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무려 백 명의 신라 학생이 국학에 재학했는데, 이는 당나라 유학생 중 최대 숫자였다. 그러다 보니 수업 연한을 넘기고도 귀국하지 않는 학생들이 늘었고, 당나라 문종은 칙명으로 신라 유학생 백여 명을 집단으로 강제 출국시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