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영화 시나리오 작가와 홍보 업무 등을 거쳐 대기업 사보와 출판사 편집장으로 근무했다. 소설 쓰기를 좋아해 젊은 시절 몇 편의 소설을 발표한 바 있다. 현재는 출판기획자 겸 작가로 활동 중이며, 지은 책으로는 『무니』,『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등이 있다.
호암(湖巖)은 호수마냥 맑은 물을 잔잔하게 가득 채우고, 큰 바위마냥 흔들리지 않는 준엄함을 뜻하는 이병철 회장의 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호수처럼, 큰 바위처럼, 그 어떤 역경이 닥쳐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수많은 고난과 위기가 닥쳤을 때에도 호암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국가와 민족을 위한 봉사의 기회로 여겼고, 평생의 신념인 ‘사업보국’을 실현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고 긍지를 느꼈습니다. 뜻 깊게도 올해가 바로 호암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책을 읽은 모든 독자들이 호암이 주는 희망의 메시지를 가슴에 품고,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눈앞에 닥친 어려움을 헤쳐 나간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게 빛날 것입니다. --- 작가의 말
호암은 마치 한겨울 허허벌판에 알몸으로 서서 칼바람을 맞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을 일구어낸 호암이었다. 사업가로서 쌓아 올린 업적, 생명보다 귀중한 명예,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지도 몰랐다. ---p.81
호암은 사채를 끌어다 써가며 공장을 지었다. 어떻게 해서든 올해 안에 공사를 마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공장을 짓는 일은 아무 탈 없이 진행되어 11월 4일에는 현장 곳곳에서 각 기관을 시험 삼아 운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7년 1월 6일에는 처음으로 기계를 움직이는 ‘시동식’을 가졌다. 전 세계 비료공장 건설 역사상 ‘최신 규모· 최대 기술· 최단 공기’라는 3대 기록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p.86
당시 호암의 아내는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 호암은 아내에게는 미안했지만 들끓어 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바다 건너 일본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호암의 도전 정신은 어쩌면 이처럼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이 키운 것일지도 몰랐다. ---p.104
호암은 왜 손해가 났는지 곰곰이 따져보았다.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다. 다른 상인들처럼 값이 오를 때 사고, 내릴 때 팔았기 때문이었다. 호암은 방법을 바꿔 값이 오를 때는 팔고, 내릴 때는 사들였다. 호암의 작전은 맞아떨어져 이듬해에는 회사를 세울 때 냈던 돈 3만 원을 제하고도 2만 원의 이익이 나왔다. ---pp.115~116
사업을 일으켜 나라에 보답하자. 그것이 내 길이다. 속삭임과도 같은 그 말이 호암의 마음에 파문처럼 번졌다. 호암이 사업에 뜻을 세운 것이 제1의 각성이라면 사업보국의 신념을 굳힌 것은 제2의 각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p.132
제일제당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현대적인 대규모 생산시설이었다. 호암은 쏟아져 나오는 설탕을 바라보며 이제야 비로소 일다운 일을 하나 해냈다는 생각을 했다. 머릿속으로만 그려왔던 사업보국을 드디어 현실에서 이루어냈다는 자부심도 생겼다. ---pp.148~149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호암이 일본 아사이신문朝日과의 기자회견에서 “전자산업은 앞으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분야이므로 이에 도전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는 한비사건으로 몸을 움츠리고 있던 삼성이 세계 초일류기업을 향해 거대한 발걸음을 내딛게 될 거라는 신호탄이었다. ---pp.181~182
호암은 삼성전자 임직원들에게 “앞으로 2년 안에 수원의 삼성산요 공장과 울주의 삼성NEC 공장을 완공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일본 도쿄의 산요단지보다 한 평이라도 더 크게 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래를 보고 전자산업을 키워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pp.188~189
호암은 휴렛팩커드의 사무실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회사의 관리자들이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 하나로 계산부터 기획, 심지어는 편지 쓰는 일까지 거의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이었다. 그때 호암은 우리나라가 잘살려면 하루빨리 컴퓨터와 반도체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것은 또한 삼성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도 했다. ---p.225
호암은 임원들이 위험한 선택이라며 반대할 때마다 강하게 말했다. “사업에는 항상 위험이 따릅니다. 그 위험을 이겨내야만 삼성의 미래가 열립니다.” 호암의 판단에 공감하고 반도체· 컴퓨터 사업에 열의를 보이는 것은 이건희뿐이었다. ---pp.226~227
삼성반도체는 IBM PC에 탑재되는 등 세계시장에서 승승장구, 오늘날 세계 최고의 반도체 생산기업이 되었다. 무에서 유를 일구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대한민국의 반도체 신화, 그 밑바탕에는 호암의 무서운 결단과 추진력이 있었던 것이다. ---pp.235~236
호암이 사업보국 다음으로 중요시한 것은 인재였다. 호암은 늘 “기업은 곧 사람이다. 사람이 기업을 만든다. 유능한 인재를 얼마나 많이 모으고 키워서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활용하느냐에 기업의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다.”고 말했다.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군에 있는 중교리라는 작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서당에서 공부도 하고 근대식 학교도 다녀 보았지만 공부에는 그다지 재주를 보이지 않았던 평범한 개구쟁이였다.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해서 대도시로 나아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다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대학교 공부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을 실망시키기도 했고, 어떤 일을 해야 좋을지 몰라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방황 끝에 자신의 길을 찾았고, 그 후부터는 포기를 모르는 열정적인 기업가로 변신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무엇보다 나라가 강해져야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고, 국가 경제를 일으키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제대로 된 생산 공장이 하나도 없던 시절에 생산 공장을 세워 산업을 일으켰고, 21세기를 내다보고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어 오늘날 대한민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해주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이 된 후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도전과 열정으로 기업인이라는 한 길을 걸은 이병철 회장. 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