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오(小梧) 설의식(薛義植)은 1901년 1월 27일(음)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한학자 오촌(梧村) 설태희의 5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바로 아래 남동생이 해방 직후 시인이자 소설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남로당에 가입한 후, 1953년 임화와 함께 숙청당한 오원(梧園) 설정식이다.
단천에서 공립보통학교와 협성실업학교를 마치고, 1917년 10월 서울 중앙중학교에 입학했다. 이 무렵 고하(古下) 송진우의 지우(知遇)를 받은 후, 그가 작고할 때까지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평생의 인연을 이어 간다. 1922년 니혼(日本)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년 5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했다. 1925년 사회부장, 1927년 도쿄 특파원을 역임하고 1935년 편집국장으로 취임했다. 편집국장으로 재직 중이던 1936년 8월, 베를린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이 문제가 되어 동아일보사를 퇴사했다. 당시 신문사의 사장은 고하 송진우였으며, 정치부장은 빙허 현진건이었다.
8·15 광복을 맞아 우익 진영의 ‘국민대회준비위’ 정부부장으로 일시적으로 활동하다가, 같은 해 12월 1일 『동아일보』가 속간되자 주간 겸 편집인으로 복귀했다. 1947년 2월 퇴사한 후, “신문적 잡지, 잡지적 신문”을 표방한 순간지(旬刊紙) 『새한민보』를 창간했다.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민족주의 계열의 언론인이자, 시사·문화 평론가였던 설의식은 1930년대 중반까지 운주산인(雲住山人) 금봉학인(錦峰學人) 임천(林泉, 숲샘) 삼성거사(三省居士) 계산도인(桂山道人) 백옥석(白玉石) 무고자(撫古子) 호고생(好古生) 만각탑(晩覺塔) 망중한인(忙中閑人) 잠물 소목오(小木吾) 등 다양한 필명(筆名)을 차용했다. 그러나 부친[오촌(梧村)]은 물론, 고조부[오산(梧山)], 증조부[오석(梧石)], 조부[삼오(三梧)] 등이 이명(異名)에 ‘오(梧)’ 자를 공유함에 따라 이후의 발표 글에서는 소오(小梧)를 주로 사용했다.
주요 저서로는, 종로구 ‘화동’에 자리 잡은 동아일보사 재직 시절에 발표한 글들이 집중적으로 수록된 『화동 시대(花洞 時代)』(1947)를 비롯해, 『해방 이전(解放 以前)』(1947) 『통일 조국』(1948) 『금단(禁斷)의 자유(自由)』(1948) 『해방 이후(解放 以後)』(1949) 『민족의 태양』(1950) 『난중일기』(1952) 등이 있으며 선집으로 『소오문장선(小悟文章選)』(1954)을 남겼다. 2006년에는 나남출판사에서 유고집 『소오문선(小悟文選)』이 간행되었다.
1954년 7월 21일 명륜동에서 향년 54세의 나이로 안타까운 삶을 마감했다.
소오(小梧) 설의식(薛義植)은 1901년 1월 27일(음)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한학자 오촌(梧村) 설태희의 5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바로 아래 남동생이 해방 직후 시인이자 소설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남로당에 가입한 후, 1953년 임화와 함께 숙청당한 오원(梧園) 설정식이다.
단천에서 공립보통학교와 협성실업학교를 마치고, 1917년 10월 서울 중앙중학교에 입학했다. 이 무렵 고하(古下) 송진우의 지우(知遇)를 받은 후, 그가 작고할 때까지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평생의 인연을 이어 간다. 1922년 니혼(日本)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년 5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했다. 1925년 사회부장, 1927년 도쿄 특파원을 역임하고 1935년 편집국장으로 취임했다. 편집국장으로 재직 중이던 1936년 8월, 베를린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이 문제가 되어 동아일보사를 퇴사했다. 당시 신문사의 사장은 고하 송진우였으며, 정치부장은 빙허 현진건이었다.
8·15 광복을 맞아 우익 진영의 ‘국민대회준비위’ 정부부장으로 일시적으로 활동하다가, 같은 해 12월 1일 ≪동아일보≫가 속간되자 주간 겸 편집인으로 복귀했다. 1947년 2월 퇴사한 후, “신문적 잡지, 잡지적 신문”을 표방한 순간지(旬刊紙) ≪새한민보≫를 창간했다.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민족주의 계열의 언론인이자, 시사·문화 평론가였던 설의식은 1930년대 중반까지 운주산인(雲住山人) 금봉학인(錦峰學人) 임천(林泉, 숲샘) 삼성거사(三省居士) 계산도인(桂山道人) 백옥석(白玉石) 무고자(撫古子) 호고생(好古生) 만각탑(晩覺塔) 망중한인(忙中閑人) 잠물 소목오(小木吾) 등 다양한 필명(筆名)을 차용했다. 그러나 부친[오촌(梧村)]은 물론, 고조부[오산(梧山)], 증조부[오석(梧石)], 조부[삼오(三梧)] 등이 이명(異名)에 ‘오(梧)’ 자를 공유함에 따라 이후의 발표 글에서는 소오(小梧)를 주로 사용했다.
주요 저서로는, 종로구 ‘화동’에 자리 잡은 동아일보사 재직 시절에 발표한 글들이 집중적으로 수록된 ≪화동 시대(花洞 時代)≫(1947)를 비롯해, ≪해방 이전(解放 以前)≫(1947) ≪통일 조국≫(1948) ≪금단(禁斷)의 자유(自由)≫(1948) ≪해방 이후(解放 以後)≫(1949) ≪민족의 태양≫(1950) ≪난중일기≫(1952) 등이 있으며 선집으로 ≪소오문장선(小悟文章選)≫(1954)을 남겼다. 2006년에는 나남출판사에서 유고집 ≪소오문선(小悟文選)≫이 간행되었다.
1954년 7월 21일 명륜동에서 향년 54세의 나이로 안타까운 삶을 마감했다.
이성천은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부를 마치고, 동대학원에서 현대문학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2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 <알리바바의 서사, 혹은 소설의 알리바이>가 당선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 말의 부도≫(2007), ≪한국 현대 소설의 숨결≫(2009), ≪위반의 시대와 글쓰기≫(2012), ≪현대시의 존재론적 해명≫(2015) 등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계간 ≪시와시학≫, ≪시에≫의 부주간 및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10회 젊은평론가상, ≪시와시학≫ 평론상, 경희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